Dark Light

새 공책은 무섭다.

이 고백을 읽고 ‘백지의 공포’ 밖에 떠올릴 수 없는 사람은 위대한 신탁에 따라 세계를 ‘거의’ 구할 정도로 용감한 용사라 할 수 있다. 나는 보다 더 치명적인 겁쟁이다.

나는 새 공책을 마주하면 안절부절못한다. 표지에 이름을 쓰고 싶은데 제대로 그리지 못할까 봐 걱정을 한다. 조형미랄까 균형미랄까, 그런 걸 담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냥 이상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괜찮다. 그럼에도 명백히 실패하면 나는 나를 오래도록 괴롭힌다. 망가진 공책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고 시선이 닿을 때마다 후회를 한다. 머릿속에서 어딘가 망가진 이름을 수백 번 고쳐 쓴다. 결국에는 괴로움의 씨앗인 공책을 깊은 서랍에 던져버린다.

곡절 끝에 첫 장을 펼치더라도 시련은 계속된다. 나는 아무 글자도 적을 수 없다. 첫 장의 격조에 부응하는 글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첫 장 앞에서 펜을 든 순간, 평소와 다름없이 솟구치는 모든 생각이 멋지지 않다. 게다가 그 뒷장에는 뒷장의 무게가 기다리고 있다. 한쪽 면만 쓸지 결정하는 일은 매우 사소한 축에 든다.

이런 나 자신이 너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어느 날, 새 공책을 몽땅 내다 버렸다. 그 와중에 질척일 만큼 미련이 이는 것도 있었다. 신한의 ‘1000中 비닐 노-트’가 특히나 심했다. 이 공책은 150×208mm 크기로, 점선과 색인이 인쇄된 종이 오십 장가량이 실로 제본되어 있었다. 색인 사각형은 조악한 인쇄품질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양 크기도 색도 망점도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비닐 커버에 디플로마체로 ‘RECORD’와 ‘Universität’를 굳이 음각한 마음을 헤아려보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만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군대에서 이 공책에 소설 초고 전부를 썼다. 하루도 쉬지 않고 썼다. 그리고 휴게실 컴퓨터로 타이핑한 뒤 행정실 도트프린터로 출력했다. 좋은 작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취의 기억 때문인지 새 노트 15권을 더 사 들고 제대를 했다. 이후 신한노트를 매개로 성취감을 느낀 적이 없다. 고립은 두고 나왔기 때문일 거다. 그 외에도 양지사의 PD수첩, 로디아의 메모패드를 십여 권쯤 쟁이고 살았다. 역시나 그날 모조리 재활용 쓰레기가 됐다.

 

블로그를 초기화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도록 첫 게시물을 못 올리고 있다. 블로그에서 첫 게시물은 새 공책 표지에 첫 페이지까지 보태놓은 것과 같다. 그걸 잘 알면서 블로그를 왜 다 엎어버리고 싶었을까.

모군닷컴의 도메인 등록일(기록상)은 2002년 11월 6일이다. 내 기억에는 1999년쯤인데 분명히 모르겠다. 도메인 비용을 제때 입금하지 않아서 도중에 죽은 걸 살렸던 것도 같다. 그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지 못하더라도 이십 년을 넘겼다. 그리고 올해는 새로운 십 년이 시작된다.

새로운 십 년 같은 건 사실 중요하지 않다. 블로그를 날리는 일 하고는 더욱이 관련 없다. 진짜 문제는 바로 지금이다. 곱씹을 영예도 실현할 영광도 없다. 글은 쓰지 않는다. 가끔 블로그 글을 열어본다. 과거 속 나에 대한 일말의 호감이 식어버린다. 글을 비공개로 돌리기도 한다. 자꾸 퇴고 마렵다. 작가들은 자신의 수십 년 전 작품을 어떻게 참고 견디는 걸까. 그리고 블로그는 어쩌다가 나를 찌르는 쇠꼬챙이로 전락한 것일까. 그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므로 재빨리 과거의 모욕을 정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내가 남길 새로운 모욕을 더 잘 참아내기 위해서도 최선이었다. 과거에 잘못이 없다는 것쯤은 나도 당연히 잘 안다. 이 순간도 과거가 될 테니까 지금 당장 단단히 살지 못한 내 탓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하루를 착실히 꾸린다면 시간 파편 중 일부는 모래벌판 속 조개껍데기처럼 관점에 따라 빛을 되비치게 되지 않을까. 내 생의 한여름에는 그런 반짝임을 보았던 것도 같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오색 마음마저 뒤범벅된 찬란이 늘 있기도 했다. 이제는 윤슬처럼 손 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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