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라디오 <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를 듣는 새벽이다.

쓸데없이, 세상이 내게 얼마나 호의적이었는지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가히 살가웠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해악을 끼친 적도 없다. 아마도 내가 세상에 어떤 도전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세상의 관심 밖에 존재.

옛집 길 건너에는 아주 커다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문을 열고 나와 눈앞에 가득한 초록 잎을 마주하면 여름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듣는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그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그냥 튼튼하면 누군가의 기쁨이 되었던 날들. 이렇게 밤마다 속삭이며 나를 유년으로 되돌려보내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밤에는 먼저 잠든 당신을 내려다보며 고마움의 편지를 쓸 수도 있겠지. 그리고 정은임이 아직 살아있는 그 시간 속 사서함 0081번으로 엽서를 보내고 싶다. 모든 일을 되돌릴 수 없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살아있음에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도록.


덧붙임. 많은 사람들이 정은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은임 추모사업회(준)>에서 운영 중인 홈페이지(http://www.worldost.com)에서 방송을 다시 들을 수 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파편, 2010년 02월

20100201 (월) 나의 ‘사랑’은 정말로 고약한 것이다. 이것을 받아 드는 그 사람은, 아마도, ‘나’라는 고약한 음식물 쓰레기를 가슴에…

명절약사(名節略史) 3/3

김 여사가 뛰어 들어왔다. 충청남도 홍성군의 지루한 평화는 그녀의 젤리 슈즈에 의해 손 써볼 틈 없이 무참하게 짓밟혔다(김…

파편, 2017년 07월

20170701 (토) 열차 옆자리에 앉은 사람… 고등학교 동창 김ㅇ미 같은데…. 20170701 (토) 아기 엄마 등에 붙어 있는 뽀로로…

밤은 우리를 가엾게 만든다

육쌈냉면 옆 골목 안에서 숨어 있던 여자가 길 가던 나를 갑자기 끌어안으며 칭얼거렸다. 나는 체한 마음을 달래듯 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