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Three Dog Night, One



경경불매(耿耿不寐) : 염려(念慮)되고 잊혀지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함.

글이 지닌 쓸모에 대한 숙고는 나만의 것이 아닐 테지만, 그 결론에 이르러서는 내가 오롯이 감당하고 수습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내 글이 남에게 읽힐 만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쓰여야 할 글인지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읽힐 만한 글과 쓰여야 할 만한 글은 애초에 맞물려 하나인데, 굳이 둘로 나누고 틈을 벌려 잔재주뿐인 글을 끼워 넣고 흉측하게 으깨질 시간을 마냥 기다리는 중일지 모른다. 글을 쓰면 쓸수록 마음이 무겁다. 적멸(寂滅). 적멸이 아니라면 어떻게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 다른 형식은 떠오르지 않는다. 나의 진정한 목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목적을 이루려는 안간힘은 후에 아주 쓸모없지 않을 것이다. 비록 가치나 쓸모에 대한 믿음 또는 그것과 닮은 착각이 직접 주어지지는 않겠지만, 나를 더 기민한 사고의 인간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반 없는 믿음에 맞서 승리할 시련이며, 이를 통해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우리가 앞으로도 단단히 산다. 그래야 계속 읽고 쓸 것이다. 읽히지 않을 것을 미리 염려하여 못 쓰지 않을 것이다. 제발, 과념치 말라.


차례(茶禮)

차례 밥 한술을 뜨고 성묘에 나섰다. 충령사 묘소에는 솔향 밴 기운이 바람에 실려 날아들어 신심 깊은 절을 올렸다. 여지없이 가을이었다. 한적한 숲길 벤치엔 어느 노부부가 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무릎이 고장 나 뒤처져 산에 오르던 어머니는 그분들에게 명절 인사를 건넸다. 부지런히 나오셨네요? 성묘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는 조금 전의 노부부가 계단 한쪽에 주저앉아 숨을 간신히 들이쉬고 있었다. 벤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려우세요? 어머니의 물음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몸이 자꾸 주저앉는다고 대답했다. 어려우면 다음에 다녀가세요. 할머니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과연 다음이 있나 하는 표정으로, 저 높은 곳에 있을 묘를 매가리 없이 쓰다듬는 듯한 표정으로, 다만 젖은 눈으로, 숨만 타일러 내쉬었다.


대추나무

어느 마을, 어느 집, 너른 마당에 수십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푸짐한 인상의 어른들뿐 아니라,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들도 여럿이었다. 훌륭하게 자란 후손들은 명절 일감에 치이다 나왔는지 한겨울의 코스모스처럼 가엾어 보였다. 연꽃처럼 수반 위를 처염하게 떠다녀도 모자랄 귀한 후손들이 어째서 온몸에 녹두전 기름을 뒤집어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괜히 안타까워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어쩌나 즐겁게 웃던지, 호적(戶籍)이란 걸 마음대로 파고 심을 수 있었다면 나를 모종처럼 번쩍 떠서 그들 사이에 옮겨 심고 싶었다. (조상님, 죄송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땅의 수많은 종친 어르신의 소망인 ‘자손의 풍요’는, 가계 원로로서의 의무감이나 조상 뵐 낯에 비비크림을 바르는 행위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받았듯이, 가계를 일궈온 분들에게 ‘여러해살이’ 자손은 으뜸의 수확물이 아닐까. 물론 나 같은 놈은 열이고 백이고 대추나무에 잔뜩 열매 맺어도 별 쓸모 없겠지만.


독존(獨存)

나를 정말 사랑한 것은 누구일까. 내놓을 오답도 없는 질문으로 또 날이 저문다.


독존(獨尊)

사랑의 모든 수사는 오직 자신을 치장한다. 결국, 형식은 있으되 내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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