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20121003 (수)

소논문을 읽고 가여운 마음이 들기는 처음이다. 이 안에서 유일하게 블라인드가 걷어 올려진 창을 통과해 들어온 오후의 볕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갔다. 창 밖으로 길고양이가 울며 지나갈 때 사람들은 웃음을 참았다. 개천절 오후의 제2열람실.


20121006 (토)

눕고서야 알아챈다. 고단하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와 이창동의 영화 《밀양》의 서사 전환전략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갑작스럽게 준비 없이 발제까지 했는데, 도식적인 면이 부족하고 서사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사 전환전략 분석이라기보다는 영화비평에 가깝다는 촌평을 들었다. 그럴듯했다. 그래도 내 보고서가 제일 멋있으니까 아무 상관 없다는 심경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이자까와 〈마포 최 대포〉에서 갈매기살을 먹었다. 식대로 4만5천 원을 냈다. 〈캐빈〉에 들러 맥주 500cc의 1/3잔을 마시는 동안 내가 이곳에서 쓰러지는 게 아닐까 깊이 근심했다.


20121007 (일)

나는 아무 맹세도 하지 않았네. 마음을 지켜주는 건 주문처럼 외는 맹세의 문장이 아니지.


20121013 (토)

생명샘 지역아동센터. 한 남자아이가 말했다. “아저씨는 여자가 없어서 슬프겠어요.” 소년아, 그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니. 딱 보니, 너도 곧 이해하게 되겠구나…. 이건 싫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정 견디기 어려우면 남자를 사랑하렴.


20121013 (토)

생명샘 지역아동센터. 잘 여문 사내아이가 자기 연필의 심을 부러 부러뜨리곤 내 샤프를 빼앗아 갔다. 의젓하게 돌려받느라 애를 먹었다. 순하디 순한 게 자꾸 심술궂은 흉내 내던 계집아이는 도화지에 ‘자기 집으로 가는 지도’를 그려 돌돌 말고 검은색 리본도 묶어서 내게 선물하며 이곳에서 곧 만나자 했다. 벽 지퍼를 열고, 몸을 밀어 넣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20121018 (목)

애니팡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나만 쏙 빼놓고 동물들을 팡팡 터뜨리고 있었다. 나보다 성적이 저조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거나 팡계를 떠난 사람뿐이다. 반나절 정도 게임에 몰입했더니 나도 당장 팡계를 떠나고 싶어졌다. 난 메달에는 욕심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허생 콤플렉스’(물론 이런 콤플렉스는 없다)가 발동하고 있다. 박지원의 한문소설 「허생전」 속 주인공인 허생이 만 냥 빚으로 백만금을 벌어 오십만금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홀연히 사라졌듯이, 그렇게 납득시키고 증명한 뒤에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애니팡 고득점의 비밀을 캐는 중이며, 상당한 소득이 있었다. 하지만 내 손의 움직임은 뒷방 서생 책장 넘기듯 느긋하기만 하다.


20121020 (토)

부랴부랴 새연세 재활의학과의원에 다녀왔다. 순전히 내 경험적 진단에 따른 것이다. 지난해에 겪었던 병증의 징후가 하나둘씩 나타나는 중이라고 의사선생님께 차분하게 이야기하자 치료를 다시 시작하자고 했다. 기나긴 치료의 전 단계로, 근육이완제와 소염제 칵테일을 링거주사로 맞고 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고 배가 고팠다. 거리를 터덜터덜 걷다가 찹쌀 순대 국밥집에 들어갔다. 식당점원은 내 손에 든 약봉지를 보고 “어디 아프신가 봐요?”라고 물었다. 나는 무겁게 웃었다.


20121021 (일)

새벽에는 폭식을 하고 잠들었다. 당장 냉장고를 비우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먹으면서 필사적으로 위안을 구했다. 늦은 밤에 안쓰안쓰 김과 함께 문화센터 수영 클래스와 아침 발기에 관해 깊은 대화를 나누며 떡볶이와 순대와 김밥과 오뎅을 먹었으면서도 어떻게 과식 만큼 폭식 또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잠에서 깨고보니 위안은 위 안에 없다.


20121022 (월)

막다른 길이다. 돌아 나가다 너를 맞닥뜨리면 또 한번 이곳으로 향할 수도 있다.


20121022 (월)

“나는 매일 슬프게 하는 나라로 갑니다.” ― 내일 당장 죽는다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긴, 한 초등학생의 글이다. 진정 훌륭하다.


20121028 (일)

최근, 죽집 아줌마와 (은유적으로) 외도 중이다. 아줌마는 매일 새로운 죽을 은근한 불에 오랜 시간 끓여 침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혓바닥이 델 만큼 뜨겁다. 오늘은 야채죽에 불고기와 낙지를 첨가한, 불낙죽이라는 죽을 끓여왔다. 흥분되지 않았다. 나는 낙지김치죽이 제일 흥… 맛이 좋았다.


20121028 (일)

모든 이에게 모든 것. 이윤설 누나의 희곡이 공연 중이다. 아마, 얄밉고 따뜻한 공연일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 나에게 누나가 말 건네는 방식이 그렇다. 줄거리는 이렇다: 강릉 바닷가 별장에 전남벌교의 신랑 가족과 서울의 신부 가족이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모인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들의 만남은 부자연스럽다. 촌사돈과 서울사돈…. 가족은 결혼식을 앞두고 조금씩 삐그덕거리며 미묘한 충돌을 하게 된다. 경사스러운날에 기쁘고 들뜨기보단, 긴장되고 적막한 분위기가 감도는 이 특별한 결혼식은 생명부지의 죽은 처녀, 총각을 맺어주는 영혼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하나 둘씩 가족간의 갈등이 드러나고, 결혼식은 난관에 부딪친다. 자살한 시인 지망생 총각과 실연당해 자살한 피아노 전공의 처녀를 위한, 저승과 이승을 초월한 이 혼례식에 우리는 모두 초대된 하객들이 된다. 과연 이들의 혼례는 무사히 치러질까?

http://www.playdb.co.kr/playdb/PlaydbDetail.asp?sReqPlayNo=40720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비물질적 육체

하얀 무릎 개강까지 아직 날이 남아있지만 회의 및 워크숍 일정이 잡혔다. 싫어도 안성행 버스를 다시 타야 한다. 어제부터…

파편, 2018년 03월

20180303 (토)  오늘부터 여름에 관해 얘기할 거야. 20180314 (수)  골목에서 초등학생(4학년쯤?) 다섯 명이 째리는데 자동으로 눈 깔았어. 뭔가…

파편, 2018년 08월

20180816 (목) 저녁에는 그의 콘서트 예매 창을 열어두고 빈자리가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 지켜봤다. 한자리쯤 나도 가져볼까 하다가 자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