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작은 마당 앞에 쪼그려 앉아 돌멩이를 던진다. 코앞 벽에 부딪혔다가 무화과나무 밑동으로 맥없이 튕긴다. 말라비틀어진 수박껍질 부근에 떨어졌는데 눈으로 찾을 수가 없다. 지금 손을 털고 일어서면 조금 뒤에는 그 돌이 어떤 돌이었는지도 모르겠지. 돌이 돌들에 섞이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들 사이로 간다.

시답지 않은 슬픔은 성실한 일수꾼의 행색으로 문을 두드린다. 어리석게 산 날에 대한 값은 무엇으로 치러야 하는지 아는 바가 없어서 방구석에 웅크린다. 내가 서서히 모두 부서지면 그것은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좋은 것들이 찾아와 무너뜨리기 위해 일으켜 세운다. 무언가의 친절이 호감에서 몽땅 흘러나온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속는다. 잠든 뒤라도 자기를 내려다볼 수 있다면 어리석음을 덜 수 있을 텐데.

그 와중에 마음을 의심할 필요 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국거리를 얼려 택배로 보냈다는 엄마의 연락이었다. 그런데 냉동실은 하드 하나 넣을 자리가 없다. 긴 고민 끝에 오늘내일 이틀 동안 먹어 치우기로 했다.

첫 번째 제거 대상으로 아주 커다란 카키색 얼음덩어리를 골랐다. 언젠가 냉동실에 넣은 기억은 있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지워졌다. 언제 확인하나 벼르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카키색 얼음덩어리는 전자레인지 해동 기능으로 무려 25분을 돌린 뒤에야 안쪽을 헤집어 엿볼 수 있었다. 이 풀뿌리는 뭐지? 검붉은 껍질은 뭐야? 오래돼서 거무튀튀하게 변한 건가? 우툴두툴한 건 닭 껍질 같은데? 정답, 녹두삼계탕! 겉보기에는 영 입맛이 돌지 않았지만 일단은 커다란 냄비에 넣고 데웠다. 서서히 끓는 동안 좋은 소금을 덜어 넣고 몇 가지 향료를 더했다. 그릇에 옮겨 담고 보니 제법 그럴싸했다. 그렇게 카키색 얼음덩어리는 냉동실에서 뱃속으로 완벽하게 옮겨졌다. 그리고 비비빅도 하나 까먹었다.

녹두(삼계탕)와 단팥(비비빅)은 원래 사이가 안 좋은 걸까? 배가 아팠다. 점점 세고 활기 있게(crescendo ed animando) 아팠다. 오후 일곱 시가 지나도록 화장실에 열네 번쯤 다녀왔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병원에는 안 간 게 아니라 못 갔다. 약국에도 갈 수 없었다. 장이 잠깐 설 때 눈치껏 몸을 뉘곤 했지만 엉덩이가 점점 묵직이 가라앉아 침대를 부수고 바닥을 뚫고 아래층 화장실 좌변기로 떨어지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잠은 당연히 오지 않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다 망했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엄마를 원망했다. 당장 전화를 걸어서 “내 냉장고에서 그만 손을 떼시지?”라고 악당처럼 경고하고 싶었다.

수십 시간 뒤, 백 보 연속 걷기가 가능할 것 같은 오만이 고개를 들자마자 약국에 갔다. 늙은 약사는 소화제와 위장관운동조절제와 정장지사제를 봉지에 담아 건넸다. 흔한 레시피 같긴 한데, 위 운동을 촉진해서 소화가 잘되고 장운동을 바르게 해서 잘 내려가는 것까지는 참 좋지만, 마지막 방생의 길을 정장지사제가 막아도 괜찮은 건지 매우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정장지사제는 빼고 복약했다. 그리고 한식경쯤 지나니 얼추 살 것 같았다.

기운이 조금 돌아오나 싶을 즈음 엄마의 국거리와 반찬이 성급히 도착했다. 테이프로 꽁꽁 싼 아이스박스를 열고 봉지들을 끄집어 내는 데 성공했지만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냉동실 상황도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참 난감해하던 차에 대봉시 몇 알이 든 봉지가 눈에 띄었다. 주황색 껍질은 식욕을 충동질했다. 감을 많이 먹으면 변비가 생긴다 하니 정장지사제 대신 먹어도 되지 않을까? 빈 위장에 뭔가를 채워야 한다면 이보다 더 적절한 게 없어 보였다. 게다가 다 먹어서 치워버린다는 계획에 후퇴란 없다.

반찬과 냉장고 사이에서 이런저런 소규모 전투를 치르는 동안 녹초가 됐다. 바닥에 잠시 주저앉았다가 복통에 일어나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병원 문은 아직 열지 않았고, 지금 당장 혼자라는 게 새삼 멸망 무렵처럼 느껴졌다. 당장 할만한 일을 떠올리다가 애꿎은 전화기를 들여다봤다. 어느 틈엔가 A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 메시지는 행성과 행성 사이를 종단하기라도 한 듯, 지난 내 물음으로부터 여러날 늦은 데다 중요한 내용마저 결락되어 있었다. 어차피 온전하게 닿지 않을 거라면 대뜸 보고 싶다고 대꾸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하지만 소화기관으로 분류해도 위화감이 없을 내 나쁜 머리로도 안 된다는 걸 곧장 알 수 있었다.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다 망했다는 확신이 들곤 한다. 그런데도 자신을 돌보는 일에 매우 열심이다. 겸연쩍다. 그 덕에 아직 살아 근미래로부터 실체 없는 위협을 당하는 것에 대한 자기 조롱은 멈췄다. 어차피 날이면 날마다 괴로움이 복리로 불어난다. 그에 반해, 내가 이루고 얻을 수 있는 건 고갈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아직까지 하루에 몇 가지씩 사소한 걸 알고 배우고 깨닫고 잊는다. 가령 이따위 것들이다. 세상에 나를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없다. 한 가수가 죽고 나니 그의 노래 속 희망은 절망을 역설한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한국 드라마를 망치는 건 가히 멀티 밤이다. 이제는 누구를 좋아해도 안 보고 잘 살 수 있을 만큼 늙어서 그게 너무 다행이고 비극이고 그렇다.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던 사람은 내가 기도를 안 해서인지 많이 죽었다. 등나무 터널을 지나는 걸 좋아하는데 나는 그런 터널을 통과해 본 적이 없다. 구운 계란을 오래 두면 메추리알보다 작아지는데 그 마른 단단함으로 알을 깨고 나온다.

이어 조금 더 깊은 잠. 꿈에서 형과 우주여행을 하러 갔다. 공공연히 꿈을 꿔본 적 없다고 말하고 다니는데 내가 겪은 것 중 가장 꿈스러운 비현실이었다. 우리 눈앞에는 흰 땅콩 껍데기 모양의 캡슐형 우주선이 놓여 있었다. 이 안에 땅콩 알처럼 들어앉으면 몸을 세울 수도 다리를 뻗을 수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여기 갇혀 무려 열네 시간을 날아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나는 다리가 저린 느낌이 들었다. 저걸 탔다가는 열네 시간 뒤에는 혀를 깨물고 죽은 채 발견되거나 미친 채로 내릴 거라고 확신했다. 대기권에 도달하기 전에 탈출 레버를 당겨 우리 집 작은 마당의 무화과나무로 떨어지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곧장 방으로 들어가 전기요를 켜고 침대에 누워…. 그러다 깼다. 나는 방이었고, 전기요가 켜져 있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곧 중앙내과 의원이 문을 열 시간이었다.


덧붙임. 잠든 뒤라도 자기를 내려다볼 수 있다면 어리석음을 덜 수 있을 텐데, 라고? 그 말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평소에도 거울을 보면 못생겨서 기분이 별로인데 나 자는 꼴까지 볼 수 있으면 큰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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