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한 해가 끝났다.

시간 인지가 많이 늦된 듯싶지만 매년 이즈음이 되어야 넘긴 달력을 되돌릴 여유가 난다. 기억해야 할 것이 얼마나 늘었는지 어림할 겨를도 생긴다. 어차피 다 잊고 말테지만, 그보다 먼저 밀려나거나 녹거나 부서질 수도 있겠지만, 어떤 기억은 잠시 들춘 것만으로도 울음이 터질 것 같다. (…) 하지만 기억 대다수는 슴슴하다. 때와 장소와 인물과 사건은 조금씩 달라지는데 그래봐야 다 아는 맛이다. 작년은 활동에 제약도 많았던 탓에 신년맞이 상차림할 추억이래봐야 몇 가지 없다. 그 와중에도 기분이라는 녀석은 참 부지런해서 기대와 불안, 기쁨과 슬픔, 외로움과 홀가분함, 미움과 사랑, 공복감과 포만감, 쯧과 쯧쯧의 사이를 오가며 밑빠진 나를 적당히 일으켰다. 저 감정의 쌍쌍이 헤어지기라도 했다면 불안과 슬픔과 외로움과 미움과 허기에 백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가장 큰 위안이었다. 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심한 비난 받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코로나 덕에 사는 일이 덜 괴로웠다. 사람 사이에 간격을 두고 벽을 세우니 애틋한 마음이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느라 입을 가리고 먼발치에 선 채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건 무해하고 다정했다. 그래서 무관심이나 회피에서도 종기만한 선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내 상상으로 만들어 씌운 인간성의 허물을 당사자가 부정·파괴할 수 없는 세계는 아득하게 평화로웠다. 그마저 유지할 수 없었다면 나는 진작 다 그만뒀을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방구석 우스갯소리 같지만, 인간 따위와 어울려 같이 살아보겠다고 돌기를 늘리며 거듭 변이하는 감염병을 지켜보면서 정말 감동했다. 치명률이 낮아지는 건 다행스럽지만 새해에는 내 몫의 괴로움을 꼼짝없이 대면해야 할 처지가 됐다.

엊그제는 23일 만에 처음 사람을 만났다. 그와 대통령 선거에 관해 떠들다가 일과 결혼으로 화제가 바뀌었다. 나는 ‘진작 망했다’는 기조를 유지하며 대화를 이었다. 그는 호기심이 생겼는지 “언제까지 망할지 알아보자”라며 타로점을 제안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정다운 스님의 『인생 12진법』으로 깨달음을 얻은 뒤 점술에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미래 예견은 (아직까지) 여러 가능성을 품은 놀이거리라서 선뜻 응했다. 그는 가방에서 뭔가 꺼냈는데, 예전 그 근사한 타로카드 한 벌이 아닌, 타로 앱을 실행한 태블릿을 내밀길래 김이 빠졌다. 화면에는 다각형 패턴이 가득한 카드 뒷면이 줄지어 있었다. 카드들 아래쪽 버튼을 누르면 섞이고 카드 낱장에 손 대면 화면 바깥으로 날아갔다. 몇 장을 더 고르니 화면을 청소하고 내가 뽑은 카드만 앞면이 보이도록 펼쳤다. 실물로 본적 있는 중세풍 카드였는데 로또복권을 자동식으로 구매한 것처럼 시큰둥한 실감이 들었다. 화면 속 카드를 슥 훑은 그는 혼자 웃었다. 이유도 모른 채 따라 웃다가 “내년은 더 나빠지지도 더 좋아지지도 않는다네요”라는 설명을 듣고 웃음에 웃음을 더했다. 금방까지 작년 한해의 온갖 괴로움을 토로한 뒤였다. 나는 올해도 다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카드의 무신경에 화가 났다. 그래도 “딱 작년만큼 망하셨네요”라는 말을 “다르지 않다”고 에둘러 갈음한 카드의 휴머니즘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뒤이어 이성운도 봤다. 카드는 내가 전혀 노력하지 않는다고 배에 새긴 그림으로 질책했다. 나는 기꺼운 사랑의 대상이 태어나지 않은 것 같다(혹은 진작 죽은 것 같다)고 항변했다. 그래서 그와 나와 타로는 연인을 만날 수 있을만한 장소 몇을 추려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런데 자꾸만 ‘The Tower’라는 카드가 나왔다. 카드 속 두 사람은 추락하는 중이다. 뒤로 보이는 탑은 번개에 맞아 불타고 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황금 왕관도 어둠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평범한 사람도 설명을 듣지 않고 그냥 알 수 있는 게 있다.


덧붙임. (이 글을 처음 올린) 인스타그램은 2200자까지 쓸 수 있다. 이제 도입인데 가득 찼다. 몇백 글자를 지웠더니 진이 빠진다. 이건 치매예방을 위한 글쓰기니까 견뎌야지. 한 기사에 따르면 “미국 유타주립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평균 73.5세 성인 215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일기처럼 긴 글을 꾸준히 써온 사람은 알츠하이머 치매를 비롯한 모든 유형의 치매 발생 위험이 53% 낮았다.”고 한다. “여섯 글자 이상의 긴 단어”를 쓰는 게 좋다지만 우리말에는 합성어 외에 긴 단어랄 게 없으니 일반어휘를 뺀 적극적어휘를 자주 적으며 살다가 무르지 않은 홍시처럼 똑 떨어져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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