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부딪친 악마의 상상력
오멘(The Omen, 2006)(‘알라딘’에서 정보보기)
존 무어 감독, 샤무스 데이비(데미안)·리브 쉐레이버(로버트 쏜)·줄리아 스타일즈(캐서린 쏜) 출연
되는 일이 없다. 사실은 해 본 일도 없다. 가끔 ‘Keep Moving’ 하려고 일어서지만 각오만으로 지탱할 수 없는 현실이 덮쳐온다. 대체 몇 년째 이 꼴인지 모르겠다.
오, 매엔(태고의 덩달이 시리즈)!
오늘은 이 모양이지만 흐린 기억 속의 나는 제법 성실한 소년이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날아온 어떤 힘이 내 귀싸대기를 힘껏 때린 것인지 제자리만 팽그르르 돌고 있다. 이런 것이 소위 운명이라는 걸까. 미물의 노력으로 거스를 수 없는 천기(天機)가 내 팔다리를 보이지 않는 실로 꿰어 조종하고 있는 걸까. 나는 이 분야 전문가인 『인생 12진법』의 저자 ‘정다운’ 스님에게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국번 없이 700-2008.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천기 데이터베이스에 접속된 사실을 알리는 징 소리가 촤-앙 들렸다. 몇 겁의 전생에까지 들리도록 이어지는 에코가 믿음직스러웠다.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모군이 고개를 들어 하나의 점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전화 건너편에서 시키는 대로 꾹꾹꾹 생년월일시를 누르니 ‘정다운’ 스님 짝퉁 ‘정다워’ 스님이 사주(四柱)에 대해 썰을 푸신다. 너무 정다우시다.
― “사람은 누구나 사주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절반이 채워진 인생의 설계도를 보시겠습니까? (많이 중략) 30초에 100원의 정보이용료가 부과됩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 다 사주 탓이었다.
― “말을 타고 떠났으나 갈 곳이 없다. 돕는 이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되돌아선다. 처량하고 외로워 피눈물을 흘린다. 앞날이 멀지 않구나. 무슨 일이든 너무 지나치게 궁극까지 내달으면 결국은 궁지에 빠져 가도 오도 못하게 되고 만다.”
정다워 스님이 아무리 속 시원히 이야기해 봐야 별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도 운명을 바꿀 방법은 모르는 눈치다. 울먹. 어머니, 어째서 출산을 5분만 더 참지 못하셨나요. 그럼 저는 축시생이었을 텐데. 그리고 정말 제 운명을 결정하신 당신이 부적 판매를 하청하신 겁니까?
황달 기운이 있는 ‘데미안(샤무스 데이비)’도 나를 따라서 전화를 건다. 6월 6일 6시. 묘시(卯時)며 묘정(卯正)이다. 불친절한 점쟁이 ‘요한’의 점괘에 따르면, 정말 최악이다. 나보다 못한 팔자는 처음이다.
― “거대한 별이 횃불처럼 타오르며 하늘에서 떨어진다. 유대인이 시온으로 돌아가고 로마제국이 일어난다. 내가 바닷가 백사장에 서자 그 짐승이 바다에서 나오는 도다. 영원의 바다에서 일어나 군대를 만들어내고 형제끼리 싸우게 한다. 인류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
이런 점괘가 700 서비스로써 가당키나 한가. 서비스 종사자로서 자각이 없는 예언자는 ‘불신지옥’을 외치는 종교인보다 훨씬 저질이다. 30초에 100원이나 받으면서.
다 같이 들은 대로 데미안은 나만큼이나 몹쓸 사주를 타고난 녀석이었다. 반드시 세상을 위해서 죽어줘야만 하는 사주. 믿기 어렵겠지만, 악마의 사주다. 선과 악을 지각할 필요 없이 본디 악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순수하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냥 말수 적은 왕따 아이일 뿐이다. 그리고 교회와 동물들을 싫어한다, 나만큼이나. 그게 문제가 되나? 오히려 내게 666의 표식이 없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네가 왜 악마의 자식이야? 데미안은 당연히 해명하지 못한다.
자, 악마의 자식은 인류를 통해 신에게 무얼 보여줄 것인가. 기대해 볼만하다.
전직 사진기자 출신 무속인의 사주풀이에 따르면 ‘바다’란 ‘정치’의 은유라고 한다. ‘로마제국’이 ‘유럽공동체’의 은유인 것처럼. 그래서 악마는 혼란과 투쟁과 혁명이 가능한 정치 세계에서 탄생할 것이란다. 권력은 악하다. 권력이 “선한 사람을 악인으로 변화시키며, 악인을 더욱 악하게 만든다”는 정치학자 ‘H. 라스웰(Lasswell, Harold Dwight)’의 당연한 말도 있다. 또한 역사학자 ‘부르크하르트(Burckhardt)’는 “권력은 어떠한 자가 그것을 행사한다 해도 그것 자체에 있어서는 악”이라고 증언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6월 6일 6시에 태어나지 않았어도 악마보다 더 악마다운 사람을 많이 알고 있다. 게다가 먹고 살 만한 집 자식으로 태어나 정치적인 방법으로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소박한 계시(에 대한 해석)인가. 난 솔직히 맥 빠진다. 이런 악마라면 계속 안심해도 좋다. 전세 계약서를 걸고 장담한다.
계시의 형식을 빌려 말하자면, 666을 머리에 새기고 태어난 악마가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 이하를 행할 것이다. 악마는 지옥에서 상상한 것보다 더 끔찍한 현실에 떨어질 텐데, 그때 구원 기도는 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악마는 이점을 미리 충분히 검토하고 등장하라. 세상은 머리 나쁜 강아지 한 마리와 교통사고로도 목숨을 잃는 악마의 사자 한 명을 앞세워 별 탈 없이 견뎌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게다가 웃지 않고서는 선거에서 당선될 수 없다.
관객은 대체 무엇에 공포를 느껴야 할까. 은유로 가득 찬 계시들이 그럴듯하게 짜여서 세상이 종국(終局)으로 치닫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주변 인물들의 예견된 죽음으로부터? 테러와 북핵 문제와 한미FTA, 그리고 CJ푸드시스템의 급식으로 인한 집단 식중독이 모두 악마로부터 기획되었다는 점을 인지함으로써? 혹은 오컬트(Occult) 영화라고 우기면서 6월 6일 0시 6분에 전 세계 동시 개봉하는 터무니없는 마케팅에 대해서?
사람들이 걱정해야 할 일은 이런 것 말고도 정말 많다. 정말 666이 새겨진 자칼의 자식이 돌아온다면 심각하게 조언하고 싶다. 담뱃값을 해마다 인상한다면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세상은 폭주할 것이다. 그리고 인하한다면, 당신은 저의 주인님입니다.
뭐, 별로 할 말 없는 영화에 대한 날림 감상문이었다. (한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