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한밤의 보일러

오늘도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잠에서 깨고 말았다. 머리맡에 놓인 휴대전화로 확인해 보니 고작 세 시간 반쯤 잔 모양이다. 달팽이처럼, 조금씩 움직이면서 끈끈한 점액질을 짜냈는지 눅눅한 요가 살갗에 닿을 때마다 불쾌했다. 늘 참을만하던 더위가 올해 처음으로 끔찍하다고 생각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선풍기를 켰다. 아니, 선풍기가 먼저였나?

불가마 같은 방 안. 내 몸에서는 그 모든 열의가 액화되어 흘러나왔고 동시에 왕새우 소금구이 냄새가 났다. 열은 항상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전도 된다는 건 모를 리 없지만 사람의 몸이 양도체(良導體)라는 것을 깨달은 건 올여름 들어서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는 몸살에 걸린 듯 앓으며 깨기 시작했다.

지난 복날에 몸보신을 못 해서 그런 건가? 나는 눅눅한 수건을 들고 샤워실로 들어가 습관적으로 온수 수도꼭지를 돌렸다. 그런데 앗, 뜨거워! 샤워실 안이 삽시간에 수증기로 가득 찼고 가슴 한쪽이 빨갛게 익었다. 바닥에 물을 줄줄 흘리면서 달려 나가 확인해 보니 보일러가 난방으로 작동 중이었다. 오늘도 또다.

요즘 자고 일어나면 보일러가 자꾸 난방으로 켜져 있다. 평소에 현관문의 잠금쇠를 걸지 않고 자는데, 엊그저께부터 단속을 시작했다. 어제도 분명히 잠갔다. 그런데 오늘도 보일러는 물을 데워 방 안을 열대성 기후로 바꿔놓았다.

이곳은 언덕 중턱에 지어진 주택이라서 방 창문 쪽은 낭떠러지에 가깝고 다용도실 쪽은 접근이 쉽지 않다. 건물과 건물이 단 한 평도 손해 없이 붙어 있어서 다른 집 담을 넘어야 간신히 좁은 틈새로 들어올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켰단 말인가? 내가 이상한 신경증에 걸렸다는 걸 인정하기보다는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것을 믿고 싶다.

열대야 속에서 잠 깨면 항상 켜져 있는 보일러. 나는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하지만 미궁 없는 명탐정, 에도가와 코난 님은 말씀하셨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 그래서 범인은, 냉동실에 꽝꽝 얼어 있는 주꾸미 귀신의 소행이다!(라고 억지 부려본다) 그러고 보니 중년 탐정 김정일 님은 “움직이는 놈이 범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대체 무슨 일이냐고.

 

극악 공포

지 어미애비도 몰라 볼 정도로 캄캄한 새벽.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 극장판 5기 ―「천국으로의 카운트다운」을 감상하다가 배가 고파서 주방으로 나갔다. 작품에 완벽히 몰입한 탓에 “란짱♡ 제게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주세효.”라고 중얼거리면서 주방 불을 켰다.

그때, 싱크대 위로 바퀴벌레 일가족이 나타났다. 셋이 한꺼번에 날 한번 흘겨보더니 걷다가 뛰다가, 난다. 으악. 온몸을 밀어 허공에 멎는 듯하다, 고급 세단의 문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날개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나는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누가 하늘을 나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했나. 그리고 단 한 가지 생각이 선명히 떠올랐다.

“이 일련의 불길한 사건들…. 때가 왔다. 이사 가자.”

집에 바퀴벌레가 출몰하고 냉동 주꾸미 귀신이 보일러에 붙은 점. 본의 아니게 주인 부부에게 정말로 미안하다, 사랑한다? 하지만 어느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습기 가득한 방안 천장에서 플라잉 바퀴벌레가 잔뜩 모여 회합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식은땀이 난다. 바퀴벌레에게는 무언가 인류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서사 한둘쯤 간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쩜 이토록 끔찍할 수 있나. 엄마야!

 

수사 종결

정황 증거들을 종합했을 때, 보일러의 난방은 플라잉 바퀴벌레의 짓이다. 새벽 시간에 보일러 난방 버튼을 이·착륙장으로 사용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제발, 내게 부딪치지 말고 안전 비행하세요. 그게 아니라면 실내 온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너희들 설마… 진화 중인 거냐?

이런 허튼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무관심하게 여름이 가고 있다. 더위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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