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일 목요일
수원에서 전세 계약을 하기 하루 전, 친구는 나의 누추한 방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알람은 여섯 시 오십 분에 맞췄다.”이다. 나는 알람 소리에 단잠을 방해받고 싶지 않으나 이 알람을 그냥 둔다. 그 시간이 막상 오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어떻게든 될 것이다. 괜한 시간에 한차례 울린 알람은 세상에 별 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알람을 꺼버리는 대신 친구의 코 고는 소리를 녹음했다. 그리워지지 않는 것은 없다. 원체 쉽게 깨는 친구라서 조심스럽게 녹음하느라 팔이 아프다. 이도 그리워지겠지.
2011년 12월 2일 금요일
알람은 객쩍게 혼자 울다 멎은 모양이었다. 친구는 정각 11시에 일어났다. 정각 11시는 수원의 어느 부동산에서 집주인과 마주하기로 약속한 시간이었다. 나는 어제 벗어둔 옷을 미끄러져 들어가듯 걸치고 친구와 택시를 잡아탔다. 도착시간은 12시 30분. 택시비는 4만 원. 칠천만 원을 건네러 길 나선 친구는 아까운 기색도 없이 택시비를 냈다. 친구가 집주인에게 돈을 송금하러 은행에 들어간 사이, 나는 멀미로 뒤집힌 속에 계란빵을 우겨 넣다가 헛 토역질을 서너 번 했다. 몹쓸.
2011년 12월 3일 토요일
한 달여 나를 괴롭힌 세 마리의 고양이(마에·두부·화단)를 콜밴에 태웠다. 세 마리의 고양이는 앞으로 새집에서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차 안에서 내내 불안해했다. 두부는 캐리어형 가방에서 자꾸 뛰쳐나오려 했고, 마에와 화단이는 상대방의 머리통을 서로 삼킨 것처럼(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아주 조용했다. 친구는 두부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괜찮다 괜찮다를 연발했다. 그러나 세 마리의 고양이가 품은 불안은 나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아무도 나를 어르지 않는다. 정말 불공평하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좋은 것이래야 부모님이 나를 일찌감치 길거리에 내다 버리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어렵사리 새집에 도착한 세 고양이는 어쨌거나 행복한 듯 보였다. 자꾸 싱크대 밑이나 창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활기차 보였다. 내 작은 방 여기저기서 걸터앉아 지내다가 지루할 때마다 사료통이나 물통을 자빠뜨리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내 작은 방의 세 짐승은 친구의 집에서 다시 애완동물이 되었다. 내가 보기엔 분명히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