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김연우, 바람, 어디서 부는지


뿌까 마또르, 놀이공원, 약밥, 백○씨, 서울 시립미술관, 농심 김치 큰사발, 팔도 김치 왕뚜껑, 벚꽃, 인사동, 청계천, 프로이트 전집, 시사회, 백○씨, 그리고 또 백○씨, 참치김밥, 90년대 여성 작가들과 윤대녕, 알밥, 오빠와 오빠의 애인, 츄파춥스, 백○씨, 청바지, 닭꼬치, <거침없이 하이킥>, 코카콜라, 네이버 뉴스, 백○씨, 애벌레 팔베개 쿠션, 레인보우 데이의 TGIF, 우동, 덕수궁 돌담길, 참치 샌드위치, 백○씨, 고흐의 「꽃이 피는 아몬드 나무」, 보리 차, 동물원, 초밥, ‘당신’이란 말, ‘당신’이라 불리던 백○씨…….


주사기의 긴 바늘이 근육에 다다르는 동안 너라는 여자가 평소 좋아하던 것을 되뇐다. 한없이 사소한 것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농심 김치 큰사발과 팔도 김치 왕뚜껑과 같은 기호가 너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만약 빙그레 캡틴 꽃게탕을 좋아했더라면, 너는 조금쯤 다른(훨씬 예민하거나 까다로운) 존재가 됐을 것이다. 너와 타자 사이에 기호·습관·외모·성격 등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너라는 존재가 이다지도 치명적인 변별력을 가지며 내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줄 수 있었을까…. 새벽에 눈이 뜨일 때마다 비명이 터지는… 이런 고통을 줄 수 있었을까.

침대 위에 웅크린 채 허기를 느낀다. 알 수 없는 주사약이 흘러들어온다. 주사약과 허기의 반응으로 인해, 괜찮아진 줄 알았던 불안·초조·울렁거림·불쾌감이 치민다. 내 머릿속엔 왜 두꺼비집이 없는 걸까. 이 절박한 질문은 하얀 침대 시트 위에 떨어진 핏자국과 짝을 이뤄 어두운 주술이 된다. 진료실을 모퉁이부터 붉게 채색하는 피. 나의 영혼은 선택된 신비주의자들처럼 이탈한다.

…여긴 르네 마그리트의 캔버스 안이다. 1948년 작품 <굶주림>. 나는 오랫동안 감춰온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는다. 내 머리를, 코를, 혀를, 빨갛고 못생긴 것을, 귀를, 목덜미를. 거대한 자루(위)만 남을 때까지 나를 씹어 삼킨다. 독단적인데 무능한 닥터 박과 (식욕의 측면에서) 먹음직스러운 간호사도. 하지만 너에 대한 기억은 머리통을 아무리 정성껏 씹어도 분해되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화가 잘되지 않는다.

“어때요? 조금 뻐근할 거예요.”

그 어떤 뻐근함이 르네 마그리트와 함께 떠난 여자가 남긴 고통에 비할까. 아니다. 고통이란 말은 너무 흔해서 육체·정신 구조를 허물어뜨리는 아픔이 과소평가될 여지가 있다. 대신 그것을 ‘무덤가의 쑥’이라고 하자. 여자가 내 가슴(여자의 무덤)에 남긴 쑥은 뿌리가 너무 깊어 캐낼 수 없다. 융통성 없는 인부는 쑥 뿌리를 쫓다가 무덤까지 파헤친다. 그럼 여자의 영혼이 튀어나와 의식과 무의식을 잇는 레인보우 브리지 사이를 배회하게 될 것이다. 다행히 아직 내 심장을 움켜쥔 쑥은 매우 무사하고 건강하다. 잎도 푸르고 새벽마다 투명한 이슬방울을 마신다. 가슴을 옥죄어도 싫지 않다. 어쩌면 돌아오는 3/4분기엔 네가 남기고 간 쑥으로 인해 화훼 기능사 자격증을 따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다음엔 화훼장식기능사 자격증을…. 결국 모조리 이루고 나면 예전처럼 새벽에 전화를 걸어 자랑하고 싶어질 텐데 어떡하지?


덧. 누군가의 가슴 속 내 무덤에는 쑥이 자라지 않겠지. 근절되었거나 폐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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