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전기를 넣었지만 반응이 없다. 그것뿐이다.

이런 일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날이 오늘일 뿐이다. 나는 소박한 ‘오늘의 사건’ 한 가지를 갖게 되었다. ‘오늘’. 이 하루에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을까. 세계 어딘가에는 ‘오늘’ 처음으로 담배나 콘트라베이스, 방역, 압운법, 사열, 물구나무서기, 연인의 성감대, 아리랑치기 등을 배운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님 혹은 자녀, 친인척, 친구, 연인, 이웃, 애완동물 등을 잃어버린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 심지어 자신이 사회적·생물학적·병리학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사람도 오늘 하루에 수천 명은 있지 않을까. 그에 비하면 나는 웃어도 괜찮다. 나는 ‘내 푸른색 세탁기의 고장’이라는 아주 사소한 불행을 분배받은 것이다.

그래, 돌연 푸른 세탁기가 고장 났다. 내가 망연해 있는 동안 창문 밖에서 암고양이가 느린 울음을 뱉고 있다. 날카로운 이로 입술을 짓이겨 소리 내는, 필사적인 울음이라고 생각될 만큼 시끄럽다. 한심한 생각이 날쌘 고양이처럼 머릿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니다. 말도 안 된다. 고양이는 세탁기와 친구가 될 수 없다. 아무리 고양이가 국민적 영물일지라도 세탁기가 자신의 은밀한 이야기, 그러니까 공기 방울의 만들어낼 때마다 속이 더부룩하다거나, 온수 밸브를 통해 찬물이 들어올 때 배신감을 느끼고 섬유 유연재가 들어오면 기분이 상쾌해져 더 빨리 회전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등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리 없다.

나는 신형세탁기의 가격을 알아보기 전에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내 푸른 세탁기는 단지 그 자리에서 경청했을 뿐이지만, 이것도 소위 추억이라는 것이다. 작년 이맘때에도 푸른 세탁기는 별 전조 없이, 멎었다. 다음날 방문한 수리기사님은 “조작부 기판을 교체해야 돼요.”라고 말했다. 이어 “임시로 돌아가게끔 만들어드릴게요. 다시 고장 나면 그냥 버리세요.”라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출장비도 거절한 채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돌아갔다. “본 건은 ‘출장 수리 취소’로 접수할 테니 출장비는 세탁기 구매하는 데 보태세요.” 이것은 과연 대우일렉트로닉스의 서비스 정신인가, 한 수리기사님의 훈훈한 마음 씀씀이인가. 비보를 들은 푸른 세탁기가 행여 가슴 아파할까 걱정하며 귓속말로 전해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감동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바로 이 세탁기가 다시 고장이 난 것이다. 이미 수명을 다했다는 녀석이 1년씩이나 빨래를 성실하게 해주었으니, 세탁기로서도 충분히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수리기사님은 푸른 세탁기를 한 번 더 소생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만 놓아주기로 했다. 이미 한계라는 것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잘가라, 푸른 세탁기. 다음 세상에선 가습기나 오디오처럼 여유로운 것으로 리사이클 되어라.

잠시 후,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세탁기의 가격을 알아봤다. 비싸다. 납득할 수 없을 만큼 비싸다. 부피 대비 기술 집적도가 최저인 와권식 세탁기의 가격이 최저 30만 원 중반이라니. 드럼식 세탁기는 50만 원대? 더군다나 10Kg 내외의 공간은 내 물, 내 세제, 내 빨래로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언제부턴가 세탁기의 세계는 정체되어 있다. 공기 방울 세탁기의 등장이 가져다준 충격은 실로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가격은 아직 그대로인가. 어째서 세탁통을 눕혀놓으면 가격이 더 비싸지는가. 드럼식은 와권식 세탁기보다 저속 회전하고 한가롭게 빨랫감이 낙하하며 세탁되는 것만 구경하는데도 말이다.

이런 분노. 세탁기 제조사에 대한 분노는 모두 슬픔의 감정이다. 나는 한동안 손빨래를 하면서 세탁기의 정지를 가슴 아파할 것이다. 손바닥에서 방울방울 일어나는 주부습진은 나의 푸른 공기 방울 세탁기, 바로 너만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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