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이문세, Song From The Snow


“28일경 기압골의 영향으로 흐리고 눈 또는 비가 오겠고, 그 밖의 날은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들어 가끔 구름이 많겠습니다. 기온은 예보 기간 전반에는 평년(최저기온 : -11∼4도, 최고기온 : 2∼12도)보다 높겠고, 후반에는 평년보다 낮겠습니다. 강수량은 평년(강수량 : 1∼7mm)과 비슷하겠습니다.”


12월 28일 목요일은 고대하던 이삿날이다. 그날 아침에 변신한 그레고리 잠자가 아니라면 바퀴벌레의 망명을 받아줄 마음이 없다. 이곳은 내가 빠져나간 뒤 새로운 무력이 점거할 것이다. 그는 바퀴벌레 퇴치 매뉴얼대로 ‘컴배트 진압 작전’부터 벌일 것이다. 이 예정된 학살에 앞서 여러 해충의 식자층은 유전자 말살을 우려할 것이다. 그리고 암컷들은 밤새 산란관을 쥐어짜 간신히 얻은 알을 ‘흑석동行 장롱 방주’에 몰래 실을 거라 짐작하고 있다. 만약, 인류에게 위악을 끼쳐온 그들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분명히 경고한다. ― “나는 세스코 투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컴배트 피하려다 세스코 만나고 싶지 않다면 꼼짝 마라.”

12월 28일(음력 11월 9일)은 ‘손 없는 날’이다. 일찌감치 용달 업체에 전화를 걸어 조목조목 짐을 꼽았더니 1톤 용달차 두 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기 올 때는 한 대도 널널한 짐이었다. 나는 다른 곳에 전화를 걸어 (덜 솔직하게 짐의 양을 말하고) 1톤 용달차 한 대를 빌렸다. 실리지 않는 것은 버리겠다, 라는 각오로. 두 대를 빌리는 것보단 한 대로 두 번 오가는 게 (번거롭지만) 값 싸리라는 멍청한 셈으로(이 경우 나는 1차 짐과 새집을 돌봐야 하니 ㅂ씨의 노동력만 1.5배로 운용하면 될 것이다. 난 정말 똘똘해).

1997년부터 시작한 자취생활 덕에 ‘이삿짐 꾸리기’만 벌써 여덟 번째다. 이번에도 변함없이 포장 끈을 이용해 책들을 꼼꼼히 묶고 있다. 한 묶음의 높이는 35센티미터, 주먹을 쥔 채 팔꿈치까지의 길이다. 이사를 거듭할수록 책이 곱절로 는다. 책상 위 두 묶음 분량의 책은 ‘이사 당일까지 읽어야 할 책’으로 분류하고 그냥 방치 중이다. 오며 가며 동네 슈퍼마켓에 들러 종이상자를 구걸해 봤지만 10개밖에 못 구했다. 방바닥에는 더 미룰 수 없는 전기요금과 수도요금, 인터넷 요금 고지서가 널브러져 있다. 각각의 자동 인출 봇이 통장을 들춰 보고 실망한 얼굴로 돌아가는 모습이 선하다.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어서 버려야 한다. 그런데 버릴 게 없다. 새집에서는 행복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웃에 찔레 향기 나는 사람이 살면 더 바랄 게 없다. 아니, 그게 누구라도 맛있는 떡을 건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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