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올림픽이 도대체 뭐!

무라카미 하루키, 『승리보다 소중한 것』, 문학수첩북앳북스, 2008.(‘알라딘’에서 정보보기)



“엥?” 소리가 튀어나오는 책 『승리보다 소중한 것』으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돌아왔다. 나는 퇴마용 주문을 외듯이 ‘그래도 하루키니까… 그래도 하루키니까…’라고 중얼거리며 동전들을 메고 서점으로 갔다. 중앙서점 계산대에는 40대 중반과 20대 초반의 점원이 서 있었다. 나는 굶주린 멧돼지가 고구마 캐 먹듯 신간 진열대를 들쑤셨지만 하루키의 책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얼마간의 창피를 무릎 쓰고(점원에게 ‘어떤 책’을 찾아달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어떤 취향’을 공포하는 기분이다) 점원에게 하루키의 신간을 찾아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무라카미 히·로·키요?”

그렇다. 두 명의 점원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전-혀 몰랐다. 나는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정확히 발음하면서 서글픔을 느꼈다. 하루키조차 시간을 견뎌내지 못하고 승마바지처럼 하나의 유행으로 저문 것일까. 이런 정조는 책 안쪽에 실린 하루키의 나이 든 사진을 마주하면서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한때 하루키에게 위로받던 세대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직까지 하루키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나 하나 밖에 남지 않은 것일까.


하루키는 『승리보다 소중한 것』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스케치한다. 평소 마라톤을 좋아하는 하루키는 앞 장을 마라톤 경기에 할애한다. 나는 1·2장을 읽음으로써 처음으로 마라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달리기가 존재한다. “그럭저럭 고통스러운 것과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것. 다른 선택은 없었다.”(17쪽) 그럼에도 선수들은 왜 출발선에 서는 것일까. 2시간여 동안 42.195km 달리기(제1회 아테네올림픽의 마라톤 코스는 실측 결과 36.75km라고 한다)를 통해서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지구력이나 폐활량은 아닐 것이다. 내 궁금증과 상관없이 선수들은 이 점에 대해 스스로 묻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나는 두 번에 걸쳐 올림픽이라는 거대하고 잔혹한 장소에 내던져졌고, 그때마다 나 자신의 존엄을 걸고 달렸다. 그것은 귀중한 달성이었다.”(16~17쪽)라며 자신에게 존경을 표한다. 물론 나도 그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존엄’까지 내걸어 달성되는 걸음걸음의 정체를. 그러나 하루키는 이 점에 의문을 품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개개의 플레이만큼은 절묘하지만, “그러한 절묘함은 정상적인 시간성의 트랙에서 벗어난 곳에, 다시 말해 엘리스의 토끼 동굴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것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전혀 상관 없”(250쪽)다는 점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 올림픽은 세상에서 사라져도 전혀 상관없을지 모른다. 그나마 올림픽이 사라져서 아쉬운 이들은 나이키·아디다스·코카콜라·비자카드 정도가 아닐까? 그리고 그동안 노력해 온 선수들. 그러나 굳이 올림픽이 아니더라도 역도선수 장미란은 세계를 번쩍 들어 올렸을 게 분명하다. 어떤 식으로든.

하루키는 한 가지 물음을 더 제기한다. “내부에 있는, 다시 말해서 ‘올림픽 환경’에 몸담은 나에게는 무질서한 운영으로 보입니다. 조만간 ‘싱크로나이즈드 역도’ ‘트램펄린 양궁’ ‘카약 던지기’ 따위의 종목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생겨서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왜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 걸까요? 실제로 ‘카약 던지기’가 행해진다면 반드시 보러 갈 겁니다. 농담이 아니라.”(248쪽)

알려진 대로, 올림픽 제2회부터 7회까지는 공식 종목으로 ‘줄다리기(Tug Of War)’가 있었다.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 결승전에선 영국의 ‘리버풀 경찰관팀’이 스파이크가 박힌 신발을 신고 나와 미국은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기권을 하기도 했다. 불과 6회 만에 사라졌지만, 온 힘을 다해서 상대국의 자존심을 끌어당기는 경기는 제법 흥미로웠을 것이다(정말 재미있었겠다!). 심지어 ‘사슴 사격’과 ‘비둘기 사격’, ‘모터보트’ 종목에도 메달이 걸려 있었다. 오늘날 정식종목 가운데 개인적으로 어리둥절한 종목이 있다면, ‘200미터 경보’와 ‘3단 뛰기’다. 열심히 훈련해 온 선수에게는 미안하지만 곧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제자리멀리뛰기’는 퇴출당했다. 자랑이랄 것도 없지만 나는 오래달리기와 제자리멀리뛰기를 참 잘했다. 여전히 제자리멀리뛰기가 올림픽 종목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베이징의 어느 경기장에서 주저앉아 더 높이 더 멀리 도약하기 위해서 숨을 고르며 진땀을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굳이 제자리에서 멀리 뛰어야 할 이유는 몰랐을 테지만.


베이징 올림픽 탓에 8월 2일 이후로 두 주간이나 『명랑히어로』가 결방됐다. ㅇ씨는 『명랑히어로』를 방영하지 않는 MBC를 지탄하고 올림픽에 저주를 퍼부었다. 나는 ㅇ씨를 이해 한다. 코리아가 몇 개의 메달을 따고 세계 몇 위를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지 않을까? 한 번쯤 설문을 해보고 싶다. 그나마 2002년 한일월드컵 때만큼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고백하자면, 사람들이 대강당에 모여 대한민국 축구팀을 응원하던 낮 시간, 나는 수목원을 천천히 거닐다가 함성이 들리면 귀를 막았다. 그렇게 6년 전에도 모든 공중파를 축구팀에게 빼앗겼다. 심지어 텔레비전만 놓여있는 곳이라면, 전자제품상점·식당·맥줏집·찻집에서도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그 정도는 아니라지만 나는 2008년에도 골목길을 걷다가 격한 울부짖음에 깜짝깜짝 놀란다.

올림픽 대표선수들의 노력은 말할 나위 없이 대단하다. 오차 없는 인간, 한계라고 부추긴 기록을 다시 경신해 내는 초인간을 기대하면서 사람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아무렴, 정말 대단하다. 여자양궁 개인전에서 박성현이 은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숙여야 했던 부조리함 속에서도, ‘올림픽에서 가장 아름다운 챔피언의 몸매 5인’(이딴 걸로 순위를 매긴다고?)에 든 장미란이 세계신기록을 3번이나 경신을 하고도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 장면을 의아하게 보면서도, 야구의 ‘승부치기’를 제대로 이해 못 한 채 관람하면서도, 나는 선수들이 마땅히 존경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사이, 이명박은 푸틴의 등 뒤에 앉아 부채질을 해주고(동영상보기), 한나라당은 미국에서 요청도 없던 아프간 재파병을 검토하고, 광복절 촛불집회에선 157명이 연행되고, 광복절은 건국절(한글2005에서 빨간 밑줄이 그어진다)이 되고, 광우병 소고기를 요 앞 정육점에서 판매를 개시했다. 물론 올림픽과 무관한 일이지만, 어째서 언론과 많은 사람은 한낱 ‘세계운동회’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100g 이하의 초경량 나이키 운동화와 쌀겨가 들어있는 이봉주의 아식스 운동화, 두 명이 도와야 입을 수 있는 박태환의 반신 수영복, 나무가 덧대져서 반동력과 균형 잡기에 도움을 준다는 역도선수의 신발이 무어 중요한가.

그럼 ‘무엇’이 더 중요할까. 죄송합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텔레비전 전 채널이 “금, 금, 금, 금”하고 외쳐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메달 셈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심통이 났을 뿐입니다. 거꾸로 내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제자리멀리뛰기 선수였다면 국민의 응원을 바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분명 더 중요한 ‘무엇’이 있을 것이다.

하루키는 말한다. “물론 나는 승리를 사랑한다. 승리를 평가한다. 그러나 두말할 필요 없이 기분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 이상으로 ‘깊이’를 사랑하고 평가한다. 때로 인간은 승리하고, 때로 패배를 맛본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324쪽)라고.

8월 8일부터 24일까지 18일간의 2008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 우리는 어쩌면 오래간만에 주변을 둘러보고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지 않았길 바란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모든 가치가 태양 아래 선명히 드러나 올바른 장소에 놓이는 것”, “이것이 진정 도달하고픈 결승점이다”(329쪽)


덧. 역대 올림픽의 국가별 순위 및 획득 메달 개수 확인은 뉴욕타임즈(바로가기)에서 하시면 매우 편리합니다.



p.8 혼자 뛰도록 내버려 두자. 진짜 레이스는 우리가 만드는 거니까. 
p.9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내가 싸워야 할 대상에 속한 하나의 표식이다.
p.9 ‘어떤 식으로 출발점에 다다르는가.’
p.9 35킬로미터 지점이든 38킬로미터 지점이든 간에, 이길 때는 이기고 질 때는 지는 법이다.
p.16-17 나는 두 번에 걸쳐 올림픽이라는 거대하고 잔혹한 장소에 내던져졌고, 그때마다 나 자신의 존엄을 걸고 달렸다. 그것은 귀중한 달성이었다.
p.17 그녀에게 달리기는 두 종류밖에 없다. 그럭저럭 고통스러운 것과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것. 다른 선택은 없었다.
p.17 도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 이런 언덕을 만든 것일까?
p.18 나는 마침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p.29 영웅이 되는 것은 그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메달을 따는 것,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목적이겠지. 하지만 동시에 영웅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다. 전혀 나쁘지 않다.
p.138 다들 가는 곳에 가지 말고 다들 하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게 여행기의 철칙이다. 다들 가는 곳에 가서 다들 하는 짓을 하면서도 다들 쓰지 못하는 글을 쓰라는 것도 하나의 철칙이지만.
p.139 공화당을 지지하는 래퍼를 보는 듯한 눈빛이다.
p.176 그나저나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10초도 안 되는 시간에 결정되다니, 대단한 일이다.
p.185-186 옛날 사람들은 ‘인간이 42킬로미터를 뛴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동했다. 얼마 전까지는 ‘인간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42킬로미터를 뛴다’는 사실 때문에 감동했다. 지금은 ‘인간이 이렇게 끔찍한 날씨에는 이토록 끔찍한 코스를 이만큼 빠른 속도로 42킬로미터나 뛰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마라톤 경기에 있어 이것은 바람직한 진화일까? 잘 모르겠다.
p.200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다.
p.203 내 말이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사람은 그렇게 악몽에 견디는 법을 배운다. 나도 배웠다. 다만 TV로 중계되지 않았을 뿐이다.
p.222 “올림픽을 보면서 제일 열 받는 건 심사위원이 있는 종목입니다. 심사위원이 필요한 스포츠 따윈 스포츠가 아니지요. 스포츠라는 건 눈으로 승패를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수영이나 육상처럼요. 10점 만점의 점수를 매기다니, 정말 어이가 없어요. 모두 집어치워야 합니다. 판정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니 누구도 이해하지 않는 거라고요.”
p.248 내부에 있는, 다시 말해서 ‘올림픽 환경’에 몸담은 나에게는 무질서한 운영으로 보입니다. 조만간 ‘싱크로나이즈드 역도’ ‘트램펄린 양궁’ ‘카약 던지기’ 따위의 종목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생겨서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왜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 걸까요? 실제로 ‘카약 던지기’가 행해진다면 반드시 보러 갈 겁니다. 농담이 아니라.
p.250 물론 하나하나의 플레이는 기술적으로 절묘합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절묘함은 정상적인 시간성의 트랙에서 벗어난 곳에, 다시 말해 엘리스의 토끼 동굴 속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것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전혀 상관없을 겁니다.
p.294 영웅은 물론 악한조차도 긴 단어를 사용하여 사색하던 그런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오늘날은 ‘지루함을 통한 감명(과 비슷한 것)’이 현실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정신적 충만감이 아닐까. 올림픽은(적어도 내게 있어서의 올림픽은) 밀도가 높은 지루함의 궁극적인 제전인 것이다.
p.320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승리뿐이다.
p.321 ‘자신에게 변명하는 것이 타인에게 변명하는 것보다 쉽다.’
p.322 나는 작가이기에 고독이 지니는 힘차고 찬란한 가치와 위험한 독성을 잘 안다. 진정한 가치를 손에 넣기 위해서 우리는 그 독과 함께 살아가는 기술을 체득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긴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그 독은 우리를 습격한다. 교활한 뱀처럼.
p.324 물론 나는 승리를 사랑한다. 승리를 평가한다. 그러나 두말할 필요 없이 기분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 이상으로 ‘깊이’를 사랑하고 평가한다. 때로 인간은 승리하고, 때로 패배를 맛본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p.328 정의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무엇이 올바른가. 결국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세월이 흐르면 추는 기울어야 할 곳으로 기울게 되어 있다. 대부분의 것은 인간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서 결정된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무엇이 대가로 지급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p.329 모든 가치가 태양 아래 선명히 드러나 올바른 장소에 놓이는 것, 그녀에게는 이것이 진정 도달하고픈 결승점이다.
p.329 나는(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승자를 사랑하고 어떤 경우에는 패자를 사랑했다. 경우에 따라선 매우 깊게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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