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의 ‘개(요설의 현혹)’ 잡는 날
이상운, 『내 머릿속의 개들』, 문학동네, 2006.

이 소설은 현학적인 요설(饒舌)로 가득 차 있다. 현상과 감정의 거친 원석을 능숙하게 세공(細工)하여, “세속적인” 현대사회를 과감하고 그럴싸하게 풍자한다. 대부분 우화(寓話)가 그렇듯, 그의 작품도 소박한 문체로 쓰였다. 그리고 희곡 작법의 차용(대화만으로 구성된 67~85쪽), 이 화법을 통해 드러나는 부조리, 생의 필연적인 부도덕과 비극에 대한 연민, 실존과 개화의 환상을 인식·표현한 점 등은 매우 인상적이다. 게다가 그의 가장 뛰어난 덕목은, 아주 쉽게 읽히며 도무지 남 얘기처럼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자 ‘고달수’는 세상의 인간을 단 두 종류로 분류한다. ‘지금 실업자인 사람’을 뜻하는 ‘존재A’와 ‘조만간 실업자가 될 사람’인 ‘존재B’. 벌써 6개월째 ‘존재A’ 상태인 고달수는 어느 날 대학 동창 ‘마동수’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연극동아리 <변신> 시절 화가 지망생이었던 마동수가 십여 년 만에 전화 걸어 온 용건은, “사랑의 구조조정을 위해서” 자신의 뚱보 마누라 ‘장말희’를 “꼬셔” “재배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부도덕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존재B’로 변신할 기회였다. 장말희의 외모는 비록 그로테스크했지만, “내면의 나라에서는 저와 같은 종족임을 알게” 된 고달수는 심각하게 고민한다. “나는 과연 대리석 덩어리 속에 있는 아름다운 비너스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결국 고달수는 자신의 실존을 던져 장말희의 추한 육체를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런 “재활용”이 잘 될 리가 없다. 오죽하면 머릿속의 개들이 웃겠나.
저자 이상운은 아직 젊다. 한 장의 사진이 아니었다면 어느 누가 그를 1959년生 작가로 생각할까. “전체가 한 문단으로 된”, 원래는 “행갈이가 전혀 없는 작품”을 문학상에 응모한 작가는 대체로 젊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점은 심사위원 ‘박완서’의 머릿속에 “혹시 자기 문체가 경박하다는 걸 의식하고 무게를 잡아보려는 계략이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을 심어 놨다. 그리고 ‘남진우’는 “다수의 동의를 획득하지 못해 밀려난 다른 몇 편의 작품보다 결정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모질게 평가한다. 나 역시 다른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혜경·서영채·신수정·조경란·김연수)보다 박완서·남진우의 의견에 손을 들어준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장점보다 한두 가지 단점이 더 위협적이다.
하지만 쪽마다 밑줄이 잔뜩 그어져 있다는 사실만은 고백해야겠다. 가령 ― 자신의 실직과 동시에 재미교포 치과의사와 결혼한 옛 여자에게 “저는 단지 반동용 로프에 지나지 않았던 것”(17쪽)이라는 재치 있는 투정, “난 미학적으로 교환가치가 형편없는 여자죠”(72쪽) 혹은 “내 영혼은 너무 추워서 이젠 이 두꺼운 살을 벗어날 수 없어요”(82쪽) 등 자기연민의 고백, “구조조정은 사물의 좌표를 강제로 바꿈으로써 불안과 긴장을 조장하는 이념과 기술이야.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새로운 에너지를 쥐어짜 낼 수 있기 때문이지”(98쪽)와 같은 통찰, “당신의 몸은 존재의 낭비입니다. (…) 오직 한 사람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살들이 있다는 것은 낭비”(140쪽)라고 외치며 사유하는 몸의 물성(物性), “뚱보가 된 장말희를 모방해 보기로 했습니다. / 그것은 또다시 실존적 정치경제학적 실험이었고, 또다시 구조조정이었습니다”(162쪽)라는 고백을 통한 비극의 암시, “비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이토록 효율적인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는 아이러니”(163쪽) 같은 농담에서 드러나는 긍정, “자본주의적으로 보아서 결혼식은 새로운 소비자의 탄생을 소란스럽게 선전하기 위한 장치였고, 장례식은 한 소비자의 소멸을 소란스럽게 은폐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164쪽)라는 철저한 자본주의적 시각,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온갖 종류의 날씬한 효율주의자들이, 밤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역겨운 비곗덩어리들을 몰래 내다 버린다”(166쪽)고 토로하며 가공된 미(美)를 향해 드러내는 환멸, “장말희처럼 뚱보가 되어서 장말희와 재회함으로써 진정한 교류를 시작한다. 그것은 극도로 수단화된 자본주의적 인간관계에 대한 자기반성이자 조롱이다”(170쪽)라는 선언으로 내비치는 역설과 비난 ― 등에 나는 밑줄 긋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가끔 등장해서 고달수의 욕망에 따라 짖고 웃다가 종국엔 내던져지는, ‘내 머릿속의 개들’이란 무엇일까. 박완서는 “현란하고 부박한 우리 사회의 온갖 기호들”을 “관망하는 천박한 욕망과 정직한 관점을 겸비한 내 마음속의 개”라고 썼다. 심각한 혼란을 겪으며 고달수는 자신의 개와 마동수의 개들 간에 교환을 경험하지만, 유사한 얼굴로 인해 구별 짓기를 포기한다는 점에서 “온갖 기호들”이란 표현은 적당하다. 하지만 개들과 인물의 욕망이 일치하거나 개들이 인물의 내적 욕망을 솔직하게 반영하고 있어, 고대극의 ‘코러스(chorus)’ 같은 장치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나는 작가 이상운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까. <문학동네 작가상>의 다른 수상자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잊을지 모르겠다. 문장은 효율인데 경쾌하다고 할 수는 없고, 세태를 관통하고 있지만 질문을 남겨주지 못하고, 실존에 대한 고민이 화자의 독백에서 머뭇거린 채 스러지고, 분노와 연민은 놀이판을 지배하는 장치처럼 건조하다. 책에 밑줄을 잔뜩 남겨놓았는데도 덮고 나니 끝이 쓰다.
나는 밑줄 친 요설을 머릿속에서 꺼내본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아무리 끄집어내고, 아무리 밖으로 던져버려도 자꾸자꾸 생겨나서, 영원히 꺼내야 할 것 같은 개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밤을 집요하게 깨우는 나의 ‘개들’을 그려본다. 진짜 거리를 배회하다가 도로 위에 죽은 비둘기를 앞발로 툭툭 건드리고 경계의 눈빛을 번뜩거리며 한 바퀴 맴돌다가 킁킁거리는, 더 복잡한 심경인 ‘개들’이 보고 싶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세상은 어째 나는 거짓말 같다. 영 믿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