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정민아, 무엇이 되어(Whatever We Are)



당신이 매일 새롭게 돋아나는―긴 손가락은 잘 데친 죽순― 숲. 길을 잘못 든 바람도 휘모리장단대로 혼자 몸부림치다가 결국 풀이 죽는 당신의 견고한 숲. 시간도 주저앉아 죽부인을 끌어안고 추억이란 것을 해보는 당신의 고인 숲. 그곳에 있는 정말 신기한 우물 하나. 애초에 두레박의 흔적이 없는 우물 하나. 그래서 당신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덜어갈 수 없는, 동서보리차가 맛 좋게 끓고 있는 우물. 내가 머무는 당신의 숲, 그 우스운 기원에 대한 이야기. 난 이번 참에 해야겠네.

그 전에, 이 숲에는 아픈 표정의 사람만 남으라. 내 일생의 우기에도 빛이 젖어 번진 곳에서 이성과 생명을 태우는 일에 열중하던 사람은 눈치 빠르게 돌고 돌아 숲의 반대편으로 가버리기를……. 숲에서 서로를 만나면 어딜 봐도 영혼의 거울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약 이 친절한 경고를 무시한 ‘환희의 인간’이 있다면 영원히 끓어 넘치라.

 

나는 황금빛깔의 여자를 사랑했다네.

내가 사랑한 여자, 동서보리차보다 고운 빛깔의 여자. 여자는 게다가 자애로워서 부족한 동서보리차를 여동생처럼 따뜻하게 보살폈네.

― 보리차가 최고로 좋아.

당신이 좋아하면 나는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 동서 보리차를 찾아 5년 만에 가는 슈퍼마켓, 그 길목의 언덕을 오르면서 당신의 즐거운 표정을 상상했네. 황금 들판의 친자매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끊임없이 웃는 정겨운 모습을 상상했네. 그리고 지혜로운 당신이 나의 수고를 알게 됐을 때, 당신만을 향한 내 기민함을 당신이 눈여겨보는 순간, 당신도 기꺼이 사랑을 느끼리라 여겼네.

콧노래와 휘파람, 나의 잡곡향 마음을 끓는 물에 넣으며, 내일은 반드시 커다란 주전자를 사야겠다고 다짐을 했지. 삐-삐― 소리를 내주는 흥겨운 ‘휘슬 주전자’가 인기 품목이라던데. 내 마음이 끓어오르고, 내 마음이 자꾸 넘쳐서,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네. 하지만 동서 순 보리차의 황금색 상자에서 티백을 꺼내 퐁당 담그며 아주 행복했다네. 청년 내몰리노(Nemorino)가 나의 보리차를 마시고 고백을 했다면 아디나(Adina)는 보리향 깃든 입술을 내던졌으리라. 아, 오, 어, 나는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보리차를 끓이는 일이 이토록 즐거운지 처음 깨달았는데. 나는 호루라기를 처음 발명한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었네. 허술한 팔다리가 탈구될 정도로 격한 춤을 췄다네. 휘-휘―휘파람을 불며.

하지만 5분 뒤에, 보리차를 최고로 좋아한다던 여자는 날 버렸다네.

― 이제 그만하자.

나는 가스레인지를 끌 정신이 없었네. 보리차가 저렇게 보기 좋게, 향긋하게 끓고 있는데 당신은 왜 나를 떠나야 할까. 왜 우리는 그만둬야 할까.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네. 그래서 네게 끓여주려고 사 온 황금색 상자를 멍하니 쳐다봤지. 보리차 향은 방 안을 천천히 떠돌고. 우리가 그만둬야 하는, 당신의 긴 각주가 나를 차츰 습하게 만들었다네. 그렇구나, 내내 내 마음은 너무 들끓었고, 그 때문에 당신은 화들짝 떠나간다는군. 그러게, 물이 끓는 도중에 보리 티백을 이토록 무심히 넣는 게 아니었는데…….

화들짝 떠난 여자, 당신이 원한 것은 태평한 사랑이었다네. 나는 너무 뜨거운 마음으로 당신을 끓였다지. 그래서 결국 나 혼자 열병에 걸려 앓으며 아직까지 보리차를 끓이고 있다는 퍽 사소한 이야기. 당신이 결코 길어가지 않을, 두레박 없는 우물에서 끓고 있는 보리차에 대한 참 시시콜콜한 이야기. 추억하며 웃을수록 얼굴만 자꾸 일그러지는, 어느 ‘환희의 인간’의 쑥스러운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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