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우린 좀 더 조심스럽게 말해요

뱅자맹 콩스탕(Henri Benjamin Constant, 1767~1830), 『아돌프(Adolphe)』, 열림원, 2002.(‘알라딘’에서 정보보기)



사랑하는 이들은 제어할 수 없는 외계의 힘에 떠밀려 광대한 폭포 앞으로 옮겨진다. 이 폭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폭포의 합보다 경이롭다. 이 폭포 앞에서 당신은 거대한 바위와 전력으로 맞부딪친 물방울이 환희에 젖어 마음껏 허공에 머무르고, 그 물 입자 틈으로 따뜻한 태양광선이 천사의 비상구인 듯 서서히 내려오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순간인 동시에 영원의 장면을 빠짐없이 관람할 수 있는 자리에 당신을 비롯한 연인들이 놓인다. 그리고 서로가 각기 다른 하나의 경이가 된다. 그 상태에 이르면 무한해 보이는 ‘감정 흐름의 울림’만이 신경을 타고 흘러 신체와 영혼을 간질인다. 이때, 당신이 미소 짓고 상대가 말하거나 당신이 말하고 상대가 미소 짓는다. 하지만 마주 서서 말하여 지는 의미의 대부분은 폭포의 울림에 삼켜진다. 형태소는 분절된 채로 간신히 전달될 뿐이다. 물론 마주 선 연인들은 말의 빈 의미 채우기 놀이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다소의 베일이 당신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준다는 견해에는 나도 이견이 없다. 여자의 다리는 스타킹을 신은 뒤에야 이데아가 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언어도 다르지 않다. 발화(發話)와 함께 일어나는 머뭇거림, 순화와 강화, 반복, 확대와 축소, 무의미한 감탄들이 의미를 재빨리 주무름으로써 청자와 화자 사이에 일종의 ‘지평융합’이 일어난다. ‘사랑의 언어’의 기쁨과 슬픔은 이 자의적인 의미 해석에 달려있다.

언어가 없는 사랑은 없다. 돌고래 초청 디너콘서트의 철야 연습 탓에 성대결절로 고생하는 ㅁ씨나 언어학습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 알파카나 곤충에게도 자신만의 언어는 존재한다(나는 요즘 알파카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 실제로 개미는 인간의 키스와 유사한 행동을 하는데, 이는 입을 맞대고 영양을 상호 교환하는 높은 차원의 애정 행위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학습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가 하면, 개체의 내·외부 요인에 의해 형성되기도 한다. 한때 사랑한 여자는 나의 추악함을 적극적으로 수집했는데, 이것으로 사랑의 농도를 판단했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추악함을 내게 전시해 자신의 사랑을 확인했다. 솔직히 이런 사랑의 언어는 좀 곤란하지만, 누군가는 그녀 언어를 완전히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뱅자맹 콩스탕(Henri Benjamin Constant)은 작품 『아돌프(Adolphe)』에서 언어와 감정의 상호작용을 관찰·기록한다. 주인공 아돌프는 ‘P*** 백작’의 헌신적인 첩, 폴란드 태생의 ‘엘레노르’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고상한 기품과 자존심과 교양과 몸가짐은 “사랑에 목마르고 내 허영심이 성공을 탐내고 있”(33쪽)던 찰나에 아돌프의 “존재를 전에 없이 활기차게 만”(34쪽)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고통의 언어로 흥분을 편지에 쏟아내자 자신의 정열이 진짜임을 믿게 된다. 언어는 손쉽게 감정의 형상을 바꿔버린다. 이 편지를 받은 P*** 백작의 첩, 엘레노르는 부도덕한 관계에 대한 공포와 친밀했던 아돌프에 대한 서운함이 뒤범벅이 되어 그를 거절한다. 하지만 결국엔 열정적인 아돌프의 언사에 뜻을 굽힌다.

그러나 아돌프에겐  “엘레노르를 어떻게 하리라는 따위의 계산도, 계획도 없었”(45쪽)다. 오직 말하여진 것과 앞으로 말해질 것들이 그를 부추긴다. 그리고 아돌프는 고백한다.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모호하고도 복잡한 것이다. 그것은 눈으로 붙잡을 수 없는 수많은 인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쓰는 말은 언제나 조잡하고 또 너무 일반적이어서, 그런 감정을 무엇이라고 지칭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감정을 어떤 것이라고 규정짓는 데에는 별 소용이 없다.”(28쪽)라고. 그에게 언어는 감정을 규정하기에 너무 조잡하며 일반적이다. 하지만 발화된 언어의 마술적인 힘은 “일단 입 밖으로 나와버리면 결코 되풀이하지 않고는 못 배기”(68쪽)도록 만든다. 엘레노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P*** 백작의 집 문간에서 엘레노르를 기다리던 아돌프는 자신이 “그토록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깜짝 놀”(37쪽)란다. 언어는 그를 바꿔놓았다. 이에 대해 『아돌프』를 분석한 츠베탕 토도르프(Tzvetan Todorov)는 “감정을 지시하고 생각을 언어화하는 것은 감정과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언어에 관한 콩스탕의 견해」, 『산문의 시학』, 문예출판사, 1992, 113쪽)이라고 말한다. 뱉어진 후에 “그것은 더 이상 전의 것이 아니”므로 “언어가 진실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거짓”(토도르프, 113쪽)이 될 뿐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돌프에게 “이런 말을 털어놓게 만든 그 감정이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다니, 이 변덕스러운 마음의 갈피를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104쪽)라는 탄식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게 한다.

사랑이라는 언어 혹은 사랑의 언어, 이 안에 숨겨진 위험은 엘레노르를 죽음으로 이끈다. 이 비극은 말의 죽음이다. 이때 비로소 얻게 되는 엘레노르의 ‘침묵’은 아돌프를 “그렇게도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던 속박, 그 속박에서 벗어”(146쪽)나게 해준다. 하지만 이때 찾아온 ‘자유’의 숨 막히는 무게는 대상의 부재로 인해 언어의 오해를 결코 풀 수 없다는 비극을 암시한다. 여기에 토도로프는 이런 견해를 덧붙인다. ― “언어는 그들이 지시하는 행동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운 것”이며, “말은 사물보다 더 중요하다. 심지어 말은 사물을 창조하기도 한다.”(토도로프, 117쪽)

그렇다. 적중할 수 없는 의사소통은 오해를 일시적으로 은폐하거나 연기(延期)할 뿐이다. 그 와중에 조잡한 사랑의 환상이 진실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 뒤에 숨어 사람들을 유혹한다. 자신의 서글픈 위장을 고백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사랑이 아닌 자신의 죽음을 끊임없이 선고함으로써 본질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이것은 승리 없는 내전이다. 이 비극이 나는 정말로 무섭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가 가엾어 나는 사랑에 대해서 침묵한다. 내가 ‘사랑의 말’에 대해 비참한 죽음을 선고하는 것은 사랑의 존재와 지속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당신들도 부디 메리 크리스마스.


(+) 위에서 언급한 츠베탕 토도로프의 『산문의 시학』은 재미있고 아주 유익하다. 본문 가운데 「5. 서술자로서의 등장인물」은 특히 신경 써서 읽을 만한 부분이다. 이 책은 예림기획에서 2003년에 다시 번역·출간되었는데 문예출판사판에 번역을 매끄럽게 하고 누락된 장을 보완했다고 한다. 가격은 두 배다. 할인율도 무려 0%. 알라딘은 마일리지 6백 원, 교보문고는 4백 원 주신다. 혹시 구매하실 분은 참조하시압.

(+) 아돌프에 대한 세기병적(世紀病的) 해석이 있다. 19세기 초 프랑스혁명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사회제도의 격심한 변동과 구세대의 붕괴로 인해 유럽 청년들에게 내면화된 환멸과 비애, 막연한 우울증과 염세적인 고독감을 지닌 인물로 아돌프를 분석하는 모양이다. 이는 콩스탕이 나폴레옹에 협력하고 호민관(護民官)을 역임했다는 이력이 주요했으리라. 뭐, 이런 입시용 해설도 나쁠 건 없다. 하지만 혐의를 둘만한 정치·사회적 요인은 나오지 않는다.



p.28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모호하고도 복잡한 것이다. 그것은 눈으로 붙잡을 수 없는 수많은 인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쓰는 말은 언제나 조잡하고 또 너무 일반적이어서, 그런 감정을 무엇이라고 지칭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감정을 어떤 것이라고 규정짓는 데에는 별 소용이 없다.

p.33 사람들은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마치 아름다운 폭풍우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듯 그녀를 주시하곤 했다.

p.51 우선 그녀는 나에게 사랑의 고백을 허락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 사랑이라는 말에도 차츰 익숙해져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녀도 나를 사랑해왔노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p.52 사랑은 일종의 마술과 같은 것이어서 오랜 추억을 대신한다. 사랑은 마치 요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하나의 과거를 만들어내어, 그것으로 우리를 감싼다. 사랑은 말하자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의 알지 못했던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듯한 느낌을 안겨주는 것이다

p.57 사랑을 시작하면서 그 관계가 영원할 것을 믿지 않는 남자가 있다면, 저주받을지어다! 여자의 품안에 안겨 있으면서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장차 그 품안에서 벗어날 때가 오리라고 미리부터 점치는 남자가 있다면, 그 또한 저주받을지어다! 마음으로 끌리는 여자에게는 그 순간 어딘지 모르게 애절하면서도 성스러운 구석이 있는 법이다. 그것은 단순한 쾌락도 아니고, 타고난 본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타락한 관능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우리에게 길들여준 타산이며, 경험에서 생겨난 반성 같은 것이다.

p.68 입을 닫을 수는 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들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노릇. 말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간직할 수는 있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나와 버리면 결코 되풀이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법이다.

p.73 각자가 나름의 이유를 들어 그녀와의 관계를 떠들어댔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이 관계에는 변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p.77 사랑하면서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노릇인가. 하지만 이미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뼈아픈 불행이다.

p.79 서글픈 모호함, 복잡한 언어여! 이처럼 불투명한 표현을 쓰면서 나는 얼마나 괴로워했으며, 그것이 명료해지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p.89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위험도 없었다. 나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 내던져져 있었다. 하지만 이 자유로운 상태는 나를 구속하는 멍에가 되어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 뿐이었다.

p.89 사람의 마음이란 항상 변하기 쉬운 것이어서, 어떤 감정을 위장하고 있으면 결국에는 그 감정을 정말로 느끼게 된다. 나도 슬픔을 감추다 보니 정말로 슬픔을 어느 정도 잊게 되었다. 쉴새없는 농담은 우울증을 덜어주었고, 엘레노르와의 대화 속에서 사랑한다고 다짐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는 진장한 사랑과 비슷한 달콤한 감동이 가득 차게 되었다.

p.96 사랑이란 모든 감정 중에서도 가장 이기적인 것이어서, 그것이 상처를 입으면 증오의 감정이 솟구치는 법이다.

p.96 우리는 이처럼 에두른 표현을 사용하여 번갈아 공격하고는, 다시 한 발짝 물러나 모호한 표현으로 불만을 털어놓고, 모호한 말투로 변명을 늘어 놓은 다음, 또다시 납덩이 같은 침묵으로 돌아가곤 했다. 우리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p.98 말하자면 우리는 마음속에 묻혀 있는 추억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었다.

p.104 나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런 말을 털어놓게 만든 그 감정이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다니, 이 변덕스러운 마음의 갈피를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p.107 사랑이나 의무도 없는데 이런 희생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이 있고 의무가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p.115 이렇게 남에게 털어놓고 나자,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져 갔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한층 더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런 감정에 더욱 강한 무엇이 깃들인 것처럼 보였다. 침밀한 사이에 남모르게 숨겨져 있는 갈등을 제삼자에게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중대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 첫걸음이나 다름이 없다. 이 친밀한 관계라는 신전 구석에 비쳐든 햇빛은 밤새 어둠으로 감싸여 있던 파괴의 흔적들을 비추어, 그 파괴를 확인하게 만든다.

p.130 나는 방금 전에 내뱉은 말에 짓눌려, 내가 제의한 약속조차 거의 믿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p.142 사랑이란 그 대상과 깊이 동화되는 것인 만큼, 절망 속에서조차 일말의 즐거움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사랑은 현실과 싸우고, 운명과 싸운다. 그 욕망이 격렬하기 때문에 사랑은 자신의 힘을 착각하고, 고뇌 속에서도 자신을 드높인다. 그러나 내 사랑은 어둡고 외로운 것이었다.

p.146-147 전에는 그렇게도 갈망했던 자유, 그 자유가 지금은 나를 숨막히는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다. 전에는 그렇게도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던 속박, 그 속박에서 벗어난 지금 내 마음은 허전하고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말하자면 나는 누구하고도 무관한 타인이었다.

p.156-157 환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자신의 성격인 것입니다.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과의 그 관계를 끊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꾼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벗어나고 싶던 고통을 다른 환경 속에 옮겨다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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