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알람은 7시 30분에 맞춰져 있었지만 그보다 40분쯤 먼저 깨어났다. 나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갈색 하이랜더’와 ‘갈색 토끼’에게 밥과 정(情)을 줬다. 게임 《타이니 팜》은 애완동물이나 가축이 얼마나 귀찮은 존재인지 미리 경험케 한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법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나는 묵은 밥을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사조 캔 참치를 부었다. 이걸 맛있다고 느끼는 순간 삶은 한없이 행복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도시바 강남 고객지원센터엔 9시 36분에 도착했다. 딱 한 시간 걸렸다. 10시가 가까웠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도시바 노트북으로 사길 잘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지 인기 없는 상표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수리받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다.

접수를 하는 여직원은 오늘도 친절했다. 그녀에게 포테제 Z830 울트라북을 건네고 30분 정도 기다리자, 며칠 전에 나와 상담했던 청년기사님이 나와 스피커 교체를 완료했다고 말했다. 나는 청년기사님께 “개봉 흔적이 남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라는 당부를 꼭 전하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다.

“약속드린 대로, 스피커 교체는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청년기사님은 윈도우 미디어플레이어로 음악 파일을 재생했다. 처음 듣는 노래였다. 나는 지난번에도 재생했던 음악을 다시 한번 재생했고, 청력에 보험을 들어둔 악기 조율사처럼 귀를 기울였다. 어쩐지 나아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단순히 음량이 줄어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나 크게 변화가 없는 것 같네요….”

청년기사님은 내 반응을 살피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교체까지 했는데 증상이 동일한 걸 보니, 역시나 제품 특성이나 한계로 볼 수밖에 없겠네요….”라고 실망한 투로 웅얼거리며 노트북을 여기저기 살펴봤다. 그런데 노트북 아랫면에 여자의 쇼트커트 머리카락 기장의 흠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바로 수긍했다. 어차피 한두 해 쓰다가 바꿀 전자제품이다. 나는 저 잘생긴 청년에게 아내를 맡겼다가 찾아가는 게 아니다.


도시바 강남 고객지원센터에서 나와 역삼역 4번 출구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10시 14분이었다. 360번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나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역삼역의 행인을 눈여겨봤다. 그중 여자들은 유독 세련되면서도 동시에 이 이상하고 변덕스러운 기후(강한 돌풍)에 걸맞은 옷을 잘도 걸치고 있었다. 키도 크고 날씬했으며 얼굴 한가운데에 아주 높은 코를 붙이고 있었다.

버스는 20분쯤 기다린 뒤에야 왔다. 버스 안은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간신히 올라탈 수 있었다. 정류장에서 눈길을 끌던 여자는 결국 탑승을 포기했다. 온갖 군상들로 가득 찬 버스는 어차피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목이 긴 꽃병 같은 여자들은 흔들림이 적은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편이 척추 건강에 좋다.

강남을 벗어나자 사람들 대부분이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그제야 여분의 손잡이를 차지할 수 있었다. 차창 밖 건물은 조금씩 낮아졌다. 그때 뭔가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고개를 돌리자 옆에 서 있던 여자의 입술이 빠르게 들썩이는 게 보였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던 탓에 이 여자가 어떤 목소리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명백한 후방 추돌이었다. 나는 그 여자만 알아챌 수 있도록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에게 미움이 생기지 않았다. 오른손으로는 차창 위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왼손으로는 투명한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투명 비닐봉지에는 흰색 반찬통과 분홍색 도시락, 세 개 들이 수세미가 담겨 있었는데, 이제 막 첫 직장과 자취방을 구하고 점심 도시락통을 장만한 사회 초년생 같은 인상이었다. 얼굴에서 드러나는 수수함은 이런 생각에 어느 정도 확신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내가 깔창을 깐 운동화를 신고 등을 수직으로 세운다 해도 플랫슈즈(순화용어는 ‘납작구두’라는데…)를 신은 그녀의 키가 더 클 것 같았다. 그녀가 길고 날씬한 (질긴 청바지의 보호를 받고 있는) 다리 한쪽을 살짝 내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길 수가 없었다. 나는 그와 같은 다리가 그녀를 초월적인 행복으로 다다르게 해주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작은 소동을 일으켰다. 나에게 한 일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과 부딪혔다. 두 사람은 중심을 잃었지만 손잡이에 매달려 넘어지는 일을 막아냈다. 그녀는 곧바로 선한 얼굴로 사과했다. 아까 나한테도 그랬을까.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그녀가 내게 부도덕한 잘못을 저지르고 매일매일 사과하길 바랐다. 이후에도 그녀는 내내 휘청거렸다. 마치 하룻밤 만에 키가 30센티미터쯤 자라난 사람인 듯 자신의 긴 몸을 가누는 일에 익숙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고속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내렸다. 나는 노래 <여수 밤바다>를 들으면서 몇 개의 정류장을 더 지나쳤다. 흑석동에선 나 말고도 두 명이 더 내렸는데, 화난 표정의 할아버지와 일용직 노동자처럼 보이는 중년의 마른 사내였다. 나는 마을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으면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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