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다시 태어나면 물미역이나 부표(浮漂)가 되고 싶다.

1지망 물미역으로 환생한다면, 바다에서 미끈한 줄기를 가꾸며 원 없이 하늘거릴 것이다. 물론 ‘나’라는 물미역의 인생은 순탄치 않을게 분명하다. 어제와 오늘처럼 절명의 위기들은 나의 모자란 이해력에서 비롯된다.

나는 물미역의 삶을 쉽사리 납득할 수 없을 것 같다. 여기서 물미역이 지닌 장점이 빛난다. 위기의 순간마다 ‘나’라는 물미역은 몸을 조금씩 찢어 홀씨를 만들고 어디론가 흘려보낸다. ‘상징적으로나마’ 나는 이곳을 떠난다. 일종의 망명. ‘나’라는 물미역은 남겨진 만큼만 괴로워한다. 그렇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성생식이다. 나로부터 발아 한 개체가 어느 심연에선가 시간이 넉넉한 고고학자처럼 내면을 발굴하고 있단 상상은 마냥 위로가 된다. 그 얄팍한 줄기에 깃든 거대한 연대. 나의 내력을 포함한 연대를 물미역'(다시)는 온전히 이해하고, 나와 마찬가지로 물미역”(다시다시)의 홀씨를 홀가분하게 불모의 곳으로 보낼 것이다. ‘우리’ 물미역에게는 애초부터 ‘역사’와 같이 어리석은 유산이 없다. 침해도, 폭력도, 불평등도, 권력의 횡포나 지배, 독재도 없다. 물미역들의 세계는 이렇게 (인문학적이 아닌) 물미역학적이고 (휴머니즘이 아닌) 물미역니즘에 입각해 있을 것이다. 나는 물미역의 진화만큼은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동시에 민들레의 전통이나 고사리의 갱생 등의 식물성 진화를 신뢰한다. 하지만 인간무리의 진화는 믿을 수가 없다. 최소한 인간무리의 정신적 진화는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청년기의 낙관적 전망을 잃어버렸다. 자다 깬 새벽, 서러움이 치밀어 올라 폭식을 일삼는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2분 30초 동안 나는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무던히 실망한다. 나는 멍청하게 유리 너머를 바라볼 뿐이다. 냉동만두가 든 전자레인지 밖에 ‘나’가 든 전자레인지 밖에 ‘너’가 든 전자레인지 밖에 ‘우리’가 든 전자레인지 밖에…… 하지만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단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행동이다. 나는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스스로 조금씩 더 불행해질 것.’

불행한 내가 조금만 더 불행해지고, 덜 불행한 당신이 조금 더 많이 불행해지고, 조금 행복한 당신이 불행을 보듬고, 행복한 당신이 불행의 개울에 뛰어든다면, 그러면 우리는 불행 속에서 모두 함께 행복할지 모른다. 이런 행동 지침이라면 나도 삶을 납득하고 누(累)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불행이 당신의 불행을 평범함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면. 한 대통령의 서거가 나의 불행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듯이…. 그렇게. 그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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