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MC Sniper, 봄이여 오라(feat.유리)

 


― 당신, 뭉클하게 좋은 당신.

― 응? 무슨 할 말 있어?

― 그냥. 통화하다가 날 잊어버렸나 해서.

― 사람은 절대 누군가를 잊을 수 없어. 그냥 희미해지는 거지.

― 그럼, 통화하다 잠깐, 내가 당신에게 희미해지는 기분이 들었나 봐.


아주 긴 침묵이 흐른다. 나는 당신이 자그만 소라껍질이라고 상상한다. 규칙적인 숨소리, 바람 소리, 파도 소리, 그리고 바다 냄새. 자연이 된 당신을 따라 나도 당신이 된다.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누군가에겐 기분 참 좋은 가루가 되어, 전화선을 타고 당신의 귓가로 가는 환희의 순간이다. 하얀 구름 같은 당신의 숨소리를 사뿐히 밟고, ○○동 ○○번지에까지 한가롭게 닿을 만큼 아주 길고 넉넉한 침묵이 마냥 즐겁다. 하지만 당신의 저항 때문에 나는 광활한 망을 떠돈다. 희미한 유령이 되어. 반면, 내 안의 당신은 점점 선명해진다. 문지를수록 반짝반짝 광이 나는 에나멜 구두처럼, 마음속에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날 들뜨게 한다.

 

― 비가 왔으면 좋겠다.

 

수화기에선 갑자기 빗소리가 들린다. 거친 잡음은 당신의 깊은 관심으로 봄비가 된다. 감각과 실재 사이의 횡단을 가능케 하는 이 관계 속에서 당신은 절대자다. 그리고 당신이 기꺼이 역사한 가장 큰 기적은 바로 나다. 하루에도 여러 번 이름 부르는 독실한 믿음을 갖게 됨으로써 나는 내가 이것도 저것도 아닐 때 당신이자 당신의 모든 것이 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또한 수억 명의 인류 가운데 당신의 곁에 지정석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내가 가슴을 쫙 펴고 거리에 나설 수 있는 특권적인 지위였다.

그렇지만 오늘의 당신은 좀 이상하다. 광활한 망에서 당신의 비에 흠뻑 젖으며 아무리 기다려도 분주한 내 마음을 인솔해 주지 않는다. 무슨 일이야? 처음으로 덜컥 겁이 난다. 노란 꽃이 되어 당신이 남기고 간 향기를 움켜쥐려던 내 방의 잎이 시시각각 시든다. 대체 무슨 일이야? 침묵. 빗소리. 생명의 하강음. 내게 천천히 등을 돌리는 당신을 본 것 같은, 이 기분.

 

― 그만, 네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여전히 당신은 절대자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걸음을 한 발 옮길 때마다 수천 마리의 개구리가 운다. 나는 대체로 수천 마리의 목청으로 울지만 종종 하나일 때도 있다. 당신으로부터의 추방은 죽을 만큼 슬프다. 하지만 그보다 당신의 땅에 결코 다시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죽지도 못할 만큼 괴롭다. 내게 주어진 괴로움으로 인해 아주 선명해진 나는 더 이상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통한 당신과의 합일’에 이를 수 없다. 우린 정말 냉정하게 분리되었다. 수만 마리의 개구리가 운다. 아무리 지랄발광을 하며 보도 위의 새파란 개구리들을 밝아 죽여도 울음소리가 줄지 않는다. 당신에겐 미안하지만, 나도 다시 울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런 당신을 잃다니. 그런 사랑을 잃다니. ― “사랑하는 사람을 잃다니 / 그 사람 분명 존재하거늘 / 사랑을 잃다니 / 사랑이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 차창룡,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부분,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민음사, 1997.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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