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보살펴라
브로큰 플라워 (Broken Flowers, 2005)
짐 자무시 감독, 빌 머레이(돈 존스턴)·제프리 라이트·샤론 스톤·프란시스 콘로이 출연.

한 여자가 B씨 앞에 아이를 업고 나타났다.
― 네가 아이 아빠야.
여자는 B씨가 잃어버린 줄 몰랐던 물건을 돌려주듯 감정이 새어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B씨는 아이 얼굴을 우두커니 들여다봤다. 닮은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가계를 줄줄이 떠올려봐도 전례 없이 예쁜 여자아이였다.
― 장난하지 마. 꺼져.
여자는 자신이 임신 하고 낳아 기르는 동안 장난스러운 일은 없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B씨는 믿지 않았다. B씨는 아침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처럼 불신이 가득한 표정으로 ‘유전자 검사’라는 말을 입 밖으로 뱉었다.
― 너 좋을 대로 해.
몇 달 후, 대전에서 날아온 우편물에는 친자일 확률이 어떤 필연보다도 확실하다는 의학 박사의 소견이 쓰여 있었다.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박사가 연루된 아이거나 B씨의 진짜 딸이거나. 하지만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여자와 박사가 무언가를 공모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B씨는 우편물을 챙겨 대문 안으로 몸을 옮겼다. 할머니의 울타리에서 하루 종일 지루함을 견디던 아이가 아빠를 발견하고 재빨리 기어 왔다. B씨는 생각했다. 자신에게 순수한 이끌림으로 몸을 내맡기는 존재는 처음이라고. 상상조차 하기 싫었던 비극이 현실이 되어버렸지만, 아빠라는 부름에는 뭉클한 감동이 깃들어 있다고. 하지만 B씨가 친자를 인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비겁함 그 자체였다. 현재 여자 친구가 이 기막힌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끔 유전자 검사 결과 우편물을 장롱의 심연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장롱과 둘만 아는 비밀을 단속하며 옛 애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몇몇은 유두의 함몰 정도만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하필 그녀일까? 어떻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내게 아이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것일까? 내게 무언가 요구하려는 건 아닐까? B씨는 한 묶음의 면봉 수에서 조금 모자라는 옛 애인들을 떠올렸고, 그들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B씨에게 사랑은 쉬운 일이었다. 몇 차례 “사랑해”라고 말하면 시작되고 자주 “그래”라고 답하면 멀어지고 일일이 대꾸하지 않으면 끝이 났다. 일찍이 사랑의 초식을 알아낸 B씨 앞에 갑자기 등장한 아이는 충격과 동시에 호기심을 안겨줬다. 등장하자마자 불현듯 자신을 아빠로 만들어버린 것뿐 아니라 혈연을 끊어낼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B씨는 매번 기꺼이 새로운 롤러코스터에 탑승해왔지만 이번처럼 안전 바가 내려오지 않는 좌석은 처음이었다. 추락이 예고된 B씨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나는 B씨에게 ‘아빠가 된 기분’에 대해 놀리듯 물었다. B씨는 지갑을 열어 보이면서 말했다.
― 우리 딸 예쁘지?
― 응. 예쁘네.

최근에 B씨가 겪은 실화에 비한다면, ‘돈 존스턴(빌 머레이·Bill Murray)’의 과거 여자는 매우 친절하고 사려 깊다. 익명의 분홍색 편지로 ‘19살짜리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서 떠난다’는 소식을 미리 전하는 일은 상대방의 도주로를 열어주는 사랑스러운 배려다. 때마침 매력적인 연인도 그를 떠났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이 없다. 20년 전 즈음 만났던 여자1, 여자2, 여자3, 여자4… 돈 존스턴은 그녀들을 차례로 찾아간다. 어쩌면 자신이 머물러야 마땅했을 자리를 직접 목도하기 위한 여행이다. 거기에는 한 스푼의 회색빛 희망도 담겨있다. (싸이월드의 미국 진출이 조금만 빨랐더라면 분홍색 편지는 파도타기와 쪽지로 대체되었을까?)
우리는 상처를 입고 떠나간 사람들의 소식을 간혹 듣게 된다. 한 시절을 괴롭히던 슬픔에도 녹이 슬고 추억에도 이끼가 앉았겠으나 그 쓸쓸함은 여전하다. 그래서 다시 끌어안아 보기도 하지만 벌어진 시간만큼 틀어진 조각은 끼워지지 않는다. 이런 이들에게 돈 존스턴은 진심으로 말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현재뿐이다.”라고.
사람들은 믿고 싶어 한다. 잘못을 깨달았다면 되돌릴 수 있다고. 하지만 인생의 가드레일이 이탈을 완벽히 막아주지 못한다. 시간이 상수로 존재하는 한 잘못 지나온 경로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면 현재를 돌봐야 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B씨와 장롱은 아직 모든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랑스러운 딸에게 새엄마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삐뚤어진 부성애에 아무도 희생되지 않길 바란다.
덧. 영화 <브로큰 플라워(Broken Flowers)>를 재생하면 텔레비전이나 모니터는 전자레인지로 변한다. 우우웅 소리를 내면서 침침한 내부에 불이 켜지면 안쪽에서 수상한 낌새가 느껴진다. 조심스럽게 문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면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인다. 저게 뭐지? 설마 빌 머레이? 당연하면서 당혹스럽다. “이봐요, 빌. 거기서 뭘 하는 거죠? 꺼내줄까요?” 빌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흔든다.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그가 터질 듯 말 듯 부풀어 오른다. 기괴한 느낌이다. (스포일러)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차 안의 통통한 청년은 빌 머레이의 친아들 ‘호머 머레이(Homer Murray)’라고 한다. 이를 두고 감상 끄트머리에 ‘2세와 동일자’에 대해 쓰다가 지워버렸다. 나만 재밌는 건 자제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