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몸의 언어와 땀의 정서

김종광, 『모내기 블루스』, 창작과비평사, 2002.(‘알라딘’에서 정보보기)

부부는 색시가 처자기도 지겨워 구경 나왔나보다 하고 그냥 무시해버렸다. 아무리 며느리 삼을 작정으로 곱게 대하고 있다지만, 대도시 사는 딸이며 사위며 불러내려 일손 삼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내고 있는 마당에, 「전원일기」 구경하듯 저 모양인 색시에게 언짢은 마음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을 시켜봐야 오 분도 못 부려먹고, 몇주일치 약값을 대주어야 할지 모른다는 지레 판단이었다.
그러나 서해는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시청을 단 십여 분에 그치고, 부부의 마음 씀을 허투루 만들었다. 순이 발목에 꿰어져 있는 물장화를 보고 용도를 깨우친 뒤, 서해는 운동화를 벗고 짐칸의 헌 물장화를 주워 신었다.
눈에 넣어도 시원찮게 생긴 것들은 뭘 신어도 폼난다니께. 서해 하는 양을 훔쳐보던 양규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모내기 블루스」, 『모내기 블루스』, p22~23.)

이게 무슨 냄시랴? 익숙허고 낯선 이 퀴퀴한 냄시의 정체가 뭐랴?

김종광의 소설집 『모내기 블루스』에 코를 들이밀면 참말 반가운데 내색하기 싫은 냄새가 난다. 충청도, 시골, 이웃, 부모님, 그리고 내가 소설 속에 있다. 한국 영화는 사수해야 하지만 쌀 수입 개방은 내 알 바가 아닌 나라에서 향토적 서정이 듬뿍 담긴 소설집은 그 자체로 새롭기까지 하다. 그간 농촌을 배경으로 삼던 소설들은 수능 응시자의 지루한 지문이 되어버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 국토의 태반은 농지일 텐데 현실에서도 소설에서도 촌놈의 삶과 목소리는 왜 이토록 관심받지 못하는 걸까. 시골 사람들의 삶은 계절의 등에 올라탄 채 매일 느긋한 유랑이나 하는 듯 보이겠지만 사실 지루할 겨를이 없다. 물론, 요즘 주목받는 세련미와 거리는 좀 있겠으나 삶도 문학도 최신 유행 취향을 경쟁하는 장이 아니다.

71년생 작가 김종광은 소설 속에서 그 세련되지 못한 몸의 언어를 마음껏 풀어낸다. 요사이 미시 담론과 사소설화 경향 속에서 명맥이 끊긴 줄 알았던 농촌 공동체와 하층 계급의 필연적인 고민, 갈등과 대립을 계승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단편 「배신」에서는 ‘내부고발자의 정의’와 ‘하층 노동자의 정의’가 대립하는 살풍경을 보여주는데, 그 경직됨을 촌놈의 정서가 살살 마사지한다. 이 능청스러움은 충청남도 보령 사람 김종광에게서 모두 나왔을 것이다. 사실 우리 동네 근방 사람들은 다 비슷한데, 그들이 죄다 소설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아서 자주 웃음이 났다.

충청도 지연 떼고 아쉬움을 덧붙이자면, 작품 대부분이 개인적 목표가 보편적 주제로 발전하기 직전에 번번이 힘을 잃었다. 그 이유와 돌파구는 ‘농민 소설’과 ‘농촌 소설’을 구분한 이재선의 글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그는 「한국현대소설사」에서 농민 소설이 “노동의 생활상이나 곤경 또는 집념과 같은 감정 영역이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현대문학』, 1992, p.459)고 말한 바 있다. 즉, 김종광의 산문에 ‘흙의 정서’는 풍부하지만 ‘땀의 정서’는 다소 빈약하다. 땀의 부진은 이문구 소설 이후에 사라졌던 입담의 재등장을 돋보이게끔 한다. 하지만 ‘감정 영역’에서는 싱겁다. 여기서 한 뼘만 더 나아가 경계를 벗어난다면 작품의 풍경이 탁 트이지 않을까 싶다. 이건 오랜 시간 고향을 떠나온 이주민의 감상인지도 모르겠다. 유사한 맥락에서 나는 동향인 김종광 작가에게 좀 더 미끈한 도시 소설을 쓸 수 없었느냐고 묻고 싶다. 언젠가 인사를 나누게 된다면 정겨운 사투리로 “뭐가 이다지 촌스럽데유.”라고 말해볼 수도 있겠다. 아니 그보다, 나는 나를 타박해 본다. 읍내에 살면서 이런 소설을 써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정답은, 나는 읍내를 모르니까. 흙냄새·흙맛도 모르고, 이앙기가 논에서 헤엄치는지 밭을 누비는지도 모른다. 귀동냥으로 알아뒀으면 좋은 밑천이었을 텐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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