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그날은 길 건너 여름이 이리 건너오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후배 J의 뒤를 따라 학교 후문 방향으로 걸었다. 급하지 않은 용무가 당시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너무 쉽게 휘발되어 버렸다. 그 기억의 자리에는 후문 길목의 대강당 앞에서 마주친 KDH 씨가 자리 잡았다. J가 인사를 마치고 소개해 주길 기다리는 동안 KDH 씨는 나를 흘끔거렸다. 충분히 호의적인 웃음을 띄고 있었지만 눈이 커다래서 경계나 위협처럼 느껴졌다. 선배인 나를 해칠 리 없다는 믿음을 스스로 지어내면서 몇 번의 실패를 경험했을 때 KDH 씨가 말을 건넸다.

“선배, 유해진 닮았어요.”

두 사람이 웃는 동안 나도 웃었다. 하지만 유해진이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영화 《주유소 습격 사건》에다 영화 《광복절 특사》를 곁들인 J의 부연 설명에 KDH 씨가 거들기 시작하고 나서야 간신히 “그래?”하고 되물을 수 있었다. 달가웠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앙금이 남은 것은 아니다. 기억이 선명하다고 모두 응어리진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머지않아 KDH 씨가 영화 동아리에 속해 있으며 배우 유해진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KDH 씨, 그는 매사에 거칠 게 없어 보였다.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또래들 틈에서 보다 견고한 걸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방향을 몰라 괴로워할 때도 그는 쥔 손을 펼쳐 보며 나아갔다. 목표에서 곁눈질하지 않는 것이 성공의 첫 번째 요건이라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그런 면 때문에라도 ‘그는 독해 보인다’는 대중(서군)의 평가를 굳이 회수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언젠가 나는 그녀의 영혼 안에 깃든 세 마녀 고르고(Gorgo)를 봤다. 고로고는 포르퀴스와 케토가 낳은 세 자매로, ‘스텐노’(힘센 여자), ‘에우뤼알레’(멀리 떠돌아다니는 여자), ‘메두사’를 말한다. 그러니까 KDH 씨는 고갈되지 않는 힘으로 학교의 인력에 늘 저항하는 듯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뱀의 머리카락을 단정히 숨긴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사진에서 방광이 팽팽해질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면 지극히 정상이다. 호기심이 동하더라도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위험한 감상은 버려야 한다. 위험하니까. 인사동에서 나눠준 3.1절 태극기를 손에 쥐고 잠시 쉬는 중인 그에게 감응될 정도라면 눈을 마주치는 즉시 돌로 변해버릴 것이다.


덧. 사진은 란비님이 찍어주셨다, 고 한다. 내면을 끄집어내는 솜씨가 빼어나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 Posts

롱기스트 야드, 피터 시걸 감독, 2005

어떻게든 승리하라 ― 리오두로커(Leo Durocher, 다저스 매니저) 롱기스트 야드(The Longest Yard, 2005)(‘알라딘’에서 정보보기) 피터 시걸 감독, 아담 샌들러(폴…

제가 벗을게요

향방작계 훈련과 용팔이 여기에도 내 절박한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있을 거다. 국민이 의무를 다하는 일은 사회 구성원의 협조가…

J씨의 전주국제영화제(JIFF) 여행에 붙임

2002년 대한민국 총인구는 48,517,871명(통계청)이다. 영화 《왕의 남자》에 1,200만 관객이 모였다. 더듬더듬 ‘엄마’만 소리 낼 줄 아는 아가들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