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방책을 잃어버린 혹은 방책이 없는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나무, 2002.(‘알라딘’에서 정보보기)



전라도 어디 석상리에서였지?

철새 떼가 매일 검은 배를 내보이며 날아가던 그 석상리에서 남자는 자신만의 시간을 몸에 조각했지. 그는 월·일·시·분·초에 해당하는 각각의 조각도를 가지고 있었어. 조각도 칼날이 지나간 면에 일렁거리는 무늬는 낮 동안 햇살처럼 내리박히다가 밤이 되면 남자를 어김없이 어느 섬으로 인도했다나 봐. 작은 요람을 타고 섬을 향해 노 저어 가는 남자의 왜소한 등. 점점 굽어가는 등. 남자는 요람에 오르기 전부터 멀미를 해. 어둠에 부패한 시간을 토해내면서도 남자는 미래가 고여 있는 섬에 무사히 닿기를 간절히 소원했지. 제발. 지난 시간을 모두 비운 남자는 셔츠를 걷어 올리고 불편한 배를 세심하게 쓰다듬어. 그리고 요람 밖으로 팔을 드리워서 단단한 파도를 하나 낚아 쥐어. 그 순간 저 먼 곳에서, 그동안 잊고 지낸, 빽빽하게 군락을 이룬 유년의 시간이 달빛에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내. 급류 탓에 다가갈 수는 없지만 마음이 벅차올라. 남자는 품 안에서 조각도를 다시 꺼내고 두꺼운 뱃가죽 위에 다가오는 시간을 조각하기 시작해. 날카로운 칼날이 지나가고 파도가 금빛 피부를 솨아­솨아 씻어내면, 오랜 날 자책케 했던 기억은 바다에 녹아들지. 그러니 남자는 홀가분해졌겠지? 그렇고말고. 그런데 남자는 왜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해 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이유는 몰라. 대신 그 죄책감의 대가로 각성한 능력을 충실히 사용했을 뿐. 대낮에도 밤의 시간을 들여다보고 그 습지를 헤매다닐 뿐. 그 석상리에서 남자는 늘 밤에 젖어 있었어. 위대한 능력은 원래 제어가 불가능한 것이니까.

― 오늘이 며칠이더라?

― 2003년 11월27일.

2023년? 11월 27일? 양력? 남자는 숫자 1, 1, 2, 7의 배열에 익숙해. 그가 태어난 날이거든. 소리성(聲)은 날짜를 일깨워 주고 남자의 이불 밑으로 책을 한 권 밀어 넣었어. 선물? 어둠 속에서도 남자는 아마 대단히 쑥스러워했을 거야. 볼 순 없었지만, 분명 그랬을 거야.

2007년에 이르러 남자는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돼.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면지에는 소리성이 조심스럽게 적었을 게 분명한 글자가 자리 잡고 있었어. “○○아, 생일 축하해. ○○이 ○○살이 되었데요. 늘 건강하게 잘 지내. 그래야 내년에 또 선물 주지.” 방심하고 읽었다가 남자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 눈과 입가 피부에 당기는 느낌이 있는 걸로 봐선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얼굴일 것 같다는 생각을 남자는 잠깐 했지. 그래서 전에 없이 크게 웃었다고 순순히 인정했어. 그러다가 더 크게 마음껏 웃어 보려고 시도했어. 이제 웃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까. 한때 짊어지고 있던 커다란 죄책감은 이미 덜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역시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냥 어디론가 흐른 것일까. 그럼에도 몸은 2003년의 어둠과 추위를 기억해 내고 떨어. 남자가 뱃가죽에 조각한 시간이 떨어. 2003년의 겨울과 2007년의 봄이 여전히 닿아 있어서 오들오들 떨어.


남자는 떤다. 뚜렷한 적(敵)이 없는 세상에서 남자는 거칠게 떤다. 청춘의 칼은 오래전에 무뎌졌다. 스스로를 벨 용기가 없던 남자의 청춘이다. 남자에게 시간은 정(情)의 생장이고 물(物)의 스러짐이었다. 그사이에 고집이 세어졌고, 근시가 심해졌고, 경직이 자연스러움을 앗아갔다. 동시에 남자는 점점 더 약해졌다. 허리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고, 다리가 자주 저리며, 방광이 물을 오래 담지 못하고, 잇몸에서 잦게 솟는 피 맛을 보며, 하나를 집중해 보지 못한다. 남자의 인생은 점점 더 악화하고 있다. 더 이상 재생이나 재건이 있을 수 없는 남자의 인생이 서늘하다.

“방책, 아아 방책. 그때 나는 차라리 의금부 형틀에서 죽었기를 바랐다. 방책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32쪽) ― 그래. 남자도 차라리 전라북도 석상리에서, 혹은 충청남도 상촌리에서 죽었기를 바랐다. 남자에겐 여전히 방책이 없다. 방책이 없는 세상에서는 목숨을 버리는 것도 방책이다. 이를 실천하지 못한 이는 서늘한 풍경의 죽음을 차츰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차선책이다. 왜 그걸 모르겠는가. 이순신도 알고, 김훈도 알고, 남자도 안다.

죽음은 소슬하다. 죽음은 역설로 가득 찬 삶의 다른 이름인 탓이다. 무릇 ‘먹을 것’은 너절한 먹을 것이건 사치스러운 먹을 것이건 간에 항상 무언가의 죽음을 담보하여 삶의 유지에 쓰였다. 하지만 그 역시 죽음을 위한 삶임이 자명하다. 즉, “죽음과 삶이 명석이 구분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188쪽)라는 냉랭한 서술을 끌어낸 역설적인 인식이 죽음을 더 소슬하게끔 만든다. 그러고 보면 모든 죽음은 비루한 자연사가 맞다.

정도(程度)를 떠나, 일종의 허무주의로 비치는 ‘죽음’과 ‘삶’에 대한 화자·작자의 인식은, 종종 한발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한 바람’으로까지 드러난다. “죽여야 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내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26쪽)다니……. 작자는 자신의 사생관을 화자에게 돋을새김해 담대한 독백을 통해 표현한다. “나는 갈 것”(301쪽)이라는 조용한 예견, 곧 이은 ‘소멸’과 ‘명멸’ 사이의 위태로운 싸움은 이순신과 김훈 공동의 싸움이다. 그 결과, ‘죽음에 대한 바람’과 ‘삶에 대한 바람’은 뒤엉켜 하나가 된다.

이는 남성성의 뿌리 깊은 아둔함이다, 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그의 아둔함은 무기력한 조정의 지원은커녕 당파 간 모략으로 마음이 형틀에 묶인 채 수군을 꾸려야 하는 한 장수의 첨예한 아둔함이었다. 닿을 곳이 죽음뿐 인줄 알면서도 독백으로써 자신을 몰아세워야 했던 화자는, 임금의 신하고 수군의 장수인 동시에, 아들 이면을 비롯한 가족의 부음을 듣고 오열할 수밖에 없던 한 가장일 뿐이다. 그러나 남자에겐 내놓을 변명이 아무것도 없다.

속내의 격전장 한 가운데, 몇몇 마음의 파편에서 여성성의 실마리도 발견된다.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206쪽) 등의 여성적 세계관을 더듬어 가면 우리는 “집중된 중심”을 비우고 “죽음과 삶을 명석히 구분”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 ‘전환’이란 일종의 꽃 피는 경계로의 진입이다. 아둔한 ‘집중’의 어리석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道)이 거기, 다름 아닌 채로, 있다. 이는 그토록 오래 남자가 진심으로 바라던 길이다.

이쯤에서는 남자의 인생이 달라져 있어야 했다. 폐가 아프다. 오늘따라 폐가 아프다. 막을 수 없던 무엇인가로부터 흉강(胸腔)을 관통당한 것 같다. ― 그러나 내일도 “나는 갈 것이다.”(301쪽)


이전에 다양한 책 판형과는 또 다른, 스스로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판형에서 모든 문자가 들여쓰기 되어 있지 않다. 나는 이것을 읽으면서 갑갑함을 느꼈다. 못내 인내를 하면서(할 수 있는 일을 할 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다. “이순신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비록 (들여쓰기) 2바이트일지라도.” 그럴듯했다. 눈에 띄진 않지만 김훈은 형식의 실험도 한 것이리라, 이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런데, 올해의 새판형에서는 이순신도 두발 물러나더라. ……이로써 내가 얼마나 관대한 인간인지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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