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모든 싸움의 끝인 벌판으로

장석주, 『햇빛사냥』, 북인, 2007.



비는 예고 없이 초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 대부분 우산이 없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라는 체념의 말을 뱉으며 길에서 서서히 젖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우산을 꺼내는 사람도 있다. 그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고 저 검은 구름 너머에까지 내보이는 것처럼 우산을 높이 활짝 펼쳐 든다. 예언자나 선지자처럼 우쭐대며, 절대자의 의중을 분명히 아는 어린 양처럼 털 한 올 젖지 않고 사뿐히 걸어간다. 사람들의 여러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쩌지 못한다. 그래, 이런 날도 있다. 나는 비구름의 영향력 아래에서 간신히 몸을 숨긴다. 어차피 갈 곳도 없다.

내가 누운 반지하 방은 점점 더 깊이 꺼져버린다. 애인은, 이런 서늘한 밤에 가뿐히 날 두고 사뿐히 가버린 애인은, 빗속에서 우산 없이 서성인다. 아기 울음소리를 내는 작은 고양이의 모습을 하기도 하고, 축축한 온몸으로 소리를 켜는 귀뚜라미의 모습을 하기도 한다. 나는 새벽마다 기울어진 땅 밑바닥에서 이리저리 뒹굴다가 간혹 전화기를 들여다본다. 지난달에 이어 이번 달에도 무료 통화 200분이 이월됐다. 나는 전화기에 쌓인 모든 시간을 주인 없는 고양이와 흠뻑 젖은 귀뚜라미에게 몽땅 쏟아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기상 탓인지 반지하 탓인지 혹은 둘 다인지, 전화기의 수신 안테나 표시가 자주 사라졌다 나타나고는 한다.

전화기의 수신 안테나 표시처럼, 눈을 깜빡 감아버렸다가 다시 뜬다. 담황색 빗방울이 떨어지다가 허공에서 사라진다. 눈을 감았다가 뜬다. 삼층짜리 다세대 주택의 반지하방 천장으로 스민 은회색 빗물이 벽지를 적신다. 눈을 감았다가 뜬다. 새벽이 아무리 캄캄해도 한 점 가로등 빛에 한 점 의지하지 않던 고양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처마 밑으로 걸어 와 미명(未明)이 녹은 물로 눈알 씻는 소리를 낸다. 눈을 감았다가 못 뜬다. 곧이어 다 커버린 새벽, 다 큰 사내가, 운다.

애인이 다시 이곳에 있다면 눅눅한 방도 기분 좋게 마를 것이다. 애인의 온기에 할 일을 빼앗긴 보일러는 긴 수관으로 잿빛 시멘트를 깨고 솟아 나와 나를 감싸 안은 채 지상을 넘어서 공중 낙원으로 들어 올려줄 것이다. 스탠드는 우리의 앞날을 비추고 전기포트는 홍차를 준비하고 제습기는 이불을 미리 까슬하게 말려둘 것이다. 순수한 사랑에는 만물을 감동시켜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애인이란 이름의 햇빛. 애인은 무신론자를 따라다니는 불신의 혐의에 대항할 유일한 알리바이다. 애인을 품고 애인이 목적이 되었을 때 모든 일은 선하다. 하지만 애인이 떠난 지금 나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다. 성당은 부서지고 폭우가 쏟아지는 벌판에 혼자 서 있다. 여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상하지 않아서 더 무섭다.



햇빛 사냥

애인은 겨울들판을 헤매이고
지쳐서 바다보다 깊은 잠을 허락했다.
어두운 삼십 주야를 폭설이 내리고
하늘은 비극적으로 기울어졌다.
다시 일어나다오, 뿌리 깊은 눈썹의
어지러운 꿈을 버리고, 폭설에
덮여 오, 전신을 하얗게 지우며 사라지는 길 위로
돌아와다오, 밤눈 내리는 세상은
너무나도 오래 되어서 무너질 것 같다.
우리가 어둠 속에 집을 세우고
심장으로 그 집을 밝힌다 해도
무섭게 우는 피는 달랠 수 없다.
가자 애인이여, 햇빛사냥을
일어나 보이지 않는 덫들을 찢으며
죽음보다 깊은 강을 건너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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