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Light

20120801 (수)

한때 좋아했던 여자의 두 아이가 노란색과 주황색 튜브를 각각 물고 양 볼을 부풀리고 있다. 큰 사내아이의 튜브에는 분홍 핸들이 달려 있고 작은 계집아이의 튜브에는 뿡뿡이 캐릭터가 엉성하게 그려져 있다. 아이들의 등 뒤로는 내가 이틀 전쯤 발라먹은 꽁치 모양 구름이 몽실 떠 있다. 다른 사진 속에 있는 여자는 전혀 늙지 않았다. 다 공갈 같다. 그녀를 좋아한 시절로부터 18년이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20120802 (목)

텍사스. 그리고 라스베이거스. 어딘가에 실재할지도 모르는 곳. 방화범 홍이 사다 준 기념품을 책상 위에 늘어놓고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정말 ‘여기’가 아닌 어떤 곳이 있단 말인가? 다 거짓말 같다.


20120803 (금)

너는 나를 흔들어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 경솔한 장난에 끼어서 모자란 술래처럼 너를 잠시 웃겨 주길 바라는 걸까.


20120804 (토)

아폴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일 달에 갔지. 너를 타고 나를 타고. 둥실둥실 사랑하느라 인류 최초의 발자국 따위는 관심 밖이었어. 월면은 아무래도 좋아. 네 볼에 입맞춤할 수 없는 달은 나사더러 다 가지라고 해.


20120809 (목)

어부 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하도 오래간만이라서 팔팔 뛰는 욕을 몇 두름 엮어 내뱉다가 “왜? 장가라도 간다고 전화했냐?”라고 농을 던졌더니,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되묻는다. 어부 정이 장가를 간다. 네놈의 추악한 과거를 배우자에게 어디까지 털어놓았느냐고 물었더니 침묵서약을 안 하면 제수씨를 소개받을 수 없을 거란 협박만 당했다. 그래, 파혼이나 안 당할까 무섭기도 하겠지…. 그리고 결혼식 사회를 부탁 받았다. 물론 거절. 나 낯 가린다고! 예식은 올해 11월17일 토요일에 치른댄다.


20120813 (월)

애니(ANNIE)에 들렀다. 풍천장어와 올드팬을 거쳐 왔다. 이곳에서 북한산 이 교수님을 뵀다. 나를 기억 못 하는 눈치였다. 십 년이 넘도록 독립영화를 찍어왔다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글 쓰는 일은 밑천이 안 들어서 좋다. 세상에 심술이 난 여자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가끔 내 무릎이나 팔뚝을 때렸다. 참을 만했다. 그 여자는 재미없는 모든 것에 화를 냈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로 비난했다. 나는 자꾸 사과를 했다. 급기야 땅콩 안주에게도 사과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너를 벗겨서 미안해, 땅콩.


20120813 (월)

우리 집 대문 앞에서 학생증을 꺼내다니…. 머리를 꽁 쥐어박고 캄캄한 방에 들어왔다. 걸친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침대 모서리에 잠시 앉았다가 일어났다. 전기주전자에 물을 받아 올려놓고 컵라면을 뜯었다. 새벽마다 이는 허기에 관해 3분만 생각했다. 경황이 없어서 못 챙겨 온 김치가 아쉽다, 는 생각을 곧 시작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널 생각할 겨를이 없다.


20120815 (수)

아이, 씨발…. 방금, 열람실 출입문의 바로 앞자리에 앉은 남자가 조그만 소리로 욕을 뱉었다. 이 소심한 일탈로 남자가 홀가분해졌으면 좋겠다. 감정의 기지개 소리처럼 들렸으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마음 쓰지 말고.


20120819 (일)

강남 토즈타워. 부지런을 떤 덕에 이십여 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프레지(Prezi) 강연 시작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전에는 족히 일흔 살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 다섯 분이 호사스러운 무늬의 우산을 곱게 접으며 4층으로 올라가셨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애터미’라는 단체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오신 분들이었다. 이분들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서 얼른 ‘애터미’를 검색했다. 애터미 홈페이지에는 온갖 제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화장품, 간고등어, 라면, 세탁세제, 팬티라이너, 칫솔, 비타민 등. 그리고 예전에 어머니가 같은 병실에 입원한 아주머니께 사서 내게 챙겨주셨던, 바로 그 치약도 있었다. 보아하니 애터미는 한국형 암웨를 지향하는 다단계 회사였다. 그렇다면… 그 할머니들은… 전설 속의 다이어몬드 회원?


20120825 (토)

현정이가 둘째 아이를 낳았다. 산파 할머니가 갓 태어난 아이를 현정이 머리 맡에 내려놓았을 시각, 나는 보나마나 쓸모 없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진작 사랑이나 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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