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녁, 바다가 잘 보이는 공터에 모여 드럼통 화로에 불을 피운다. 늦봄의 아련한 바람이 불어와 마음을 간질인다. 첨벙거리는 소리에 고개 돌리면 뒤따라 뛰어오른 물고기의 은비늘이 달빛에 반짝거린다. 무리 중 한 사람이 곁에 쌓인 종이를 뭉쳐 불길 속에 던진다. 노을이 다시 지는 것처럼 바닷물이 붉게 물든다. 중력을 태우고 검은 허공으로 천천히 떠올라 별이 되는 불씨. 군대 생활에 적응하면서 차츰 꺼져가던 감상에 불을 옮기고 별은 미련 없이 꺼진다.
군대 보안 문서를 태우는 작업은 하루 여덟 시간씩 3주간 계속됐다. 그 여파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사내들이 한동안 부대 안을 배회했다. 그들을 보고 허물없는 부대원들은 한 마디씩 던졌다.
“얼굴이 왜 그러십니까? 씅난 귀두(龜頭) 같습니다.”
그는 여러 날 불길을 들여다보며 깨달은 것을 물음으로 돌려주었다.
“불을 품는 용 얼굴이 왜 빨간색인지 알아?”
군대는 ‘쓸모없는 문서’의 생산 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하지만 ‘쓸모없는 문서’의 폐기 시스템은 오합(烏合)이다. 종이를 잘게 갈아버리는 장비 같은 건 없다. 오로지 소각(燒却). 그마저도 낮에는 해양경찰의 요청으로 소각이 불가능하고 저녁에는 화재 발생의 우려로 근무자가 항상 지켜야 한다. ○○사단으로 칠성사이다 육백 상자가 보급된 게 어째서 3급 보안 사항인지는 논의하지 말자. 칸쵸 세 상자의 물품 명세서도 3급 보안이니까.
보안에서 문서 파기는 핵심 사항이다.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사병 두어 명에게 보안 문서 상자를 들려 바닷가 공터로 내보낸다. 라이터로 힘겹게 붙인 불을 쬐며 문서를 태우는 과정이 영 미덥지 못하다.
자칫 적군에게 군대 보안 문서가 넘어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칠성사이다 육 백 상자를 실은 황금마차가 운송 중에 공격당한다면 정말 큰일이 벌어진다. 해당 부대의 군인은 칠성사이다 대신 본사 직배송인 코카콜라를 먹을 수밖에 없으니 치아가 더 썩을 게 아닌가. 국군 장병이 외래진료를 나가 이를 때우고 신경치료를 받는 동안 대한민국은 전복될 것이다. 그제야 문서 파기 대행업체를 떠올려봐야 아무 소용 없다.
문서는 완벽하게 파기해야 한다. 모두 문서를 엄중하게 다뤄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별 쓸모없는 문서 아님?”
아님. 절대 아님.
쓸모는 존재와 마찬가지로 주체에 모든 걸 의탁할 수 없다. 칠성사이다 보급 서류가 적국에게 큰 의미를 지니듯이(?), 우리와 관련된 모든 부산물은 다른 누군가에게 큰 가치를 지닌다. 납부를 마친 요금고지서는 종이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음식물쓰레기 투기를 단속하는 사람에게는 불법 행위자를 적발(摘發)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본래 불법적인 행위를 해선 안 된다고? 이걸 실수로 포장하면 더욱 치명적이다. 요금고지서만 미리 잘 폐기더라면 부주의에서 비롯된 잘못으로 음식물쓰레기 불법 투기 벌금 50만 원을 내느라 밥 굶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늘 뉴스에도 개인정보를 무신경하게 관리한 사정으로 범죄 피해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가 나왔다.
현대인에게 문서세단기는 필수품이다. 우선순위를 매겨보자면 문서세단기는 베개, 이불, 전기장판, 그다음이다. 나도 문서세단기를 꼭 가져야겠다. 버튼 하나로 종이 위 모든 것을 아예 없던 걸로 만들어주는 전동 문서세단기로. (갖고 싶은 게 또 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