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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7일과 5월9일 사이, 가족.

어머니는 숨을 쉴 때마다 목이 간질간질하다며 저녁 내내 기침을 하셨다. 새벽엔 수차례 자다 깨길 반복하며 가래를 뱉으셨다. 샛노란 색이다. 지난번 귀향 때만 해도 없던 일이다. 아버지는 나 몰래 작은 혹 두 개를 갑상선에 가지고 계셨다. 비록 수술로 떼어낼 필요가 없는, 선악이 나뉘기 이전의 순수한 혹이라지만 난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채기가 난 것처럼 목구멍 한쪽이 아프다. 벌써 몇 개월째지만 나 역시 (같은 이유로)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생각이다. 어리광 부리며 칭얼대기를 좋아하지만 걱정을 끼치고픈 생각은 레알 없다. (…대단히 길고 지루한 감상 삭제…) 대신 식후에 하나의 「용각산」을 번갈아 퍼 먹는다. 이런 게 가족이 아닌가 한다.

5월7일과 5월9일 사이, 집.

나를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는 ‘게 찌개’에 몇 사발의 물을 부었을까. 가스레인지 곁에 서서 자꾸 졸아드는 국물을 지켜보며 내가 걷고 있을 읍내 곳곳을 그렸을 것이다. “찻길 조심해라. 그리고 차는 더욱 조심해라.” 한 블록 밖에서 서성이던 게 찌개 냄새 속에서 나는 그런 보살핌의 기운을 맡았다. 그래서 꽃게탕 보다 게 찌개가 좋다. 누군가 다른 점이 무어냐 물으면,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머니의 풀리지 않는 파마머리와 그 수수함에 관해 한참 떠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소읍에 대한 감상적인 소회를 덧붙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부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소읍의 찬연함보다 이국공항의 미끈함에 익숙한 사람이 점점 는다. 물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앙코르와트를 여행하기 위해서 팔도명산의 사찰을 빠짐없이 둘러볼 필요는 없다. 그보다 신경 써야 할 것은 ‘공간의 혼잣말’이다. 듣거나 말거나, 모든 공간들은 (우리가 엄마를 걸고 주장하는 것 이상의) 완고한 어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럼 우리는 각자 다양한 종류의 리시버가 되어 공간과 주파수를 맞춘다. 우리가 다른 한 공간으로 몸을 옮긴다는 것은 그 공간에 어울리는 정물이 되고자하는 것이다. 만약 이곳에서 한동안 돌멩이나 나무나 이정표가 되는데 성공했다면, 우리는 이제 저곳에 있던 우리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공간의 요구에 따라 무조건 변신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와 공간 사이의 일치가 있다면 당연히 불일치도 있고 치열한 분쟁도 일어난다. 나는 이질적인 자극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반디앤루니스 보다는 제일서점에, 크라제버거 보다는 롯데리아에, (어마어마한) 백화점 보다는 재래시장에 놓이는 게 편안하다. 우연히 살림을 푼 재개발 예정지역에서 여러 해 주저앉아 버렸듯이. 지금의 내가 게 찌개와 고봉밥이 오른 밥상 앞에 놓여 있듯이. 나는 숟가락에 밥알이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주의하며 떠먹었다. 서툰 수저질을 보여 밥을 자주 챙겨 먹지 않는단 사실을 들키면 큰일이다. 묵묵히 식사실력을 평가하던 어머니는 얼마 전에 다녀온 돌잔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아빠는 내 동창이지만 이름 외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너는 언제 낳아서 애 학교 보낼래? 그냥 혼자 늙어 죽을 거냐?” “폐 끼치지 않고 혼자 사는 게, 그게 뭐가 나빠요.” 나는 내가 사는 것에 관해 생각할 때, 어머니는 내가 죽는 것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모씨 대는 누가 잇냐?” “그것 좀 끊어지면 어때요.” “얼라? 돼지는 한 번에 젖을 열네 개씩 물리는디 너는 고거 두 개도 다 못 물리냐?” “내가 깨물 것도 없네요.” 어머니는 전통적인 종족보전의 의무에 대해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나의 DNA가 세계에 남겨지지 않는다면, 인류진화의 과정에서 이것은 이것대로 의미 있는 결과라고. “그럼 너랑 니 형 죽으면 젯밥도 다 얻어먹었네? 밥 많이 먹고 오래오래 살아라.” 네. 알겠어요. 나는 오래 살고 싶다. 나는 지루하도록 오래오래 살면서 모든 아름다움의 적멸(寂滅)을 목격하고 싶다. 어쩌면 건넌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 조카들이 결혼을 할 때쯤 나는 작은 일에도 눈물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건 그것대로 역시 무섭다. 너무나 무서워서 뭐라도 씹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곁에 놓여있던 삼립 「누네띠네」를 집었다. 「누네띠네」의 1백44겹 조직이 입 안에서 부서진다. 나는 자취방에서 먹던 1백개들이 「누네띠네」 생각했다. 반갑다. 너무 반가워서 참말로 고향에 온 것만 같았다.

5월7일과 5월9일 사이, 고향.

줄무늬 라운드 셔츠를 입은 소년이 사거리에 서서 좌우를 둘러보다가 의사총방향 건널목을 걷기 시작한다. 한 쪽 다리가 짧은 꼬마병정처럼 절뚝이며 걷는다. 걷다가 폴짝폴짝 뛴다. 나는 왼쪽으로 이동했다가 재빨리 오른쪽으로 돌아오길 반복하는 소년의 짙은 그림자를 보면서 나의 지루한 오월과 여름과의 거리를 생각했다. (어찌된 일인지) 여름은 머지않았다. 나와 그림자, 우리는 빛에 의해 곧 더 선명해질 것이다. 그렇다. 나는 여름에 기대를 걸고 있다. 개인적으로, 땀과 끈적임은 재밌다. 돌연 재미없어지면 말끔히 씻어내면 된다. 소년이 두 번째 건널목을 무단으로 횡단한지 한참이 지났지만 첫 번째 건널목의 신호등은 여전히 파란색이다. 신호에 걸려 선 차는 없다. 잠시 후 군청방향 건널목에 파란신호가 켜졌다. 한 여고생이 손에 카네이션 바구니를 들고 흥겹게 날 앞질러 길을 건너갔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뻤다. 껴 안아주고 싶을 만큼, 그 건강한 몸도 마음도 너무 예뻤다. 이 두 가지만 잘 간직한다면 여고생은 아쉬울 것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부분에서 나는 처참히 실패했고, 아쉽기만 한 삶을 살고 있다. 애초에 갖지 못한 것을 간직할 방법은 없다. 길가엔 카네이션을 파는 노점 여럿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노점주인들은 어버이날 제 자녀가 카네이션을 내밀면 ‘어느 집에서 샀느냐?’고 추궁할 것 같은 얼굴로 장사를 했다. 나는 곤란을 겪고 있을 카네이션 노점주인의 자녀를 위해 기도했다. 문득,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자기 반의 담임선생님이었던 반장아이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어버이 날 뿐 아니라 스승의 날에도 아버지의 가슴에 직접 꽃을 달아드렸다. 당시 나는 (멍청하게도) 선생님과 함께 사는 친구를 가끔씩 걱정했다. 저 깐깐한데다 대머리인(?) 선생님과 함께 살다니! 계부와 함께 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알고 보니 주변의 몇몇 친구는 경찰관이나 군인이나 교도관과 동거 중이었다. 한참 내키는 대로 걷다가 꽃을 잘 꺾기보다는 꽃을 잘 가꿀 것처럼 보이는 꽃집에 들어갔다. 좋든 싫든, 어버이날만큼은 부모님의 가슴에 붉은 카네이션을 달아드려야 한다, 라는 형식을 꼭 지켜야 한다. 알이 둥글지 않으면 닭은 그것을 품지 않는다. 난 꽃집에서 ①화려하게 꽃꽂이 한 카네이션과 ②단지 화분에 담아놓았을 뿐인 카네이션을 15분 정도 번갈아 들여다보다가 ②수수하게 화분에 담긴 카네이션을 하나 사가지고 나왔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을 담은 결정이었다. 아무래도 끈기 있게 사는 것이 아름답다. 화려하거나 말거나 일단 살고 볼 일이다. 어린 시절, 나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덜컥’ 요절하고 싶어 했다. 물론 천재작가가 된 후에, 운명이 모가지를 덜컥! 당시 우리는 적당히 재능 있었고 염세적이었다. 하지만 천재는 없었다. 죽음은 있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헐렁한 검은양복을 뒤집어 쓴 채 미지근한 육개장을 퍼먹으며, 병풍 너머 존재에 관해 3할 나에 관해 7할을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엔 요절한 천재작가이기 보다는 정원사가 되겠다고 결정했다. 화려하거나 말거나 일단 살고 볼 일이다. 나는 살아 있어서 너를 보았다. 나는 어떤 형식의 죽음으로도 너를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삶이 애써 베푼 것에 대해선 죽음으로 갚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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